- 09 Dec, 2025
'왜 이렇게 했어?'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내가 본 것
"왜 이렇게 했어?"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내가 본 것 그날의 시작 월요일 오후 3시. 선배가 내 자리로 왔다. "주니야, 배너 시안 좀 보자." 심장이 뛰었다. 주말 내내 만든 시안이다. 레퍼런스 10개 보고, 레이아웃 3번 바꿨다. 색도 5번 바꿨다. 선배가 내 모니터를 봤다. "음." 이 '음'이 제일 무섭다.30초쯤 지났을까. 선배가 물었다. "여기 여백, 왜 이렇게 했어?" 나는 대답했다. "아... 그게..." 선배가 다시 물었다. "이 컬러는 왜 선택했어?" "어... 레퍼런스가..." "이 폰트 조합은요?" "..." 입이 안 열렸다. 이유를 몰랐다. 그냥 예뻐 보여서 사실은 이랬다. 여백은 '그냥 이 정도면 괜찮아 보여서'. 컬러는 '레퍼런스 중에 하나가 이 색이어서'. 폰트는 '요즘 많이 쓰는 거라서'. 전부 '그냥'이었다. '왜냐하면'이 없었다. 선배가 말했다. "주니야, 디자인은 이유가 있어야 해." "클라이언트가 물어보면 뭐라고 할 거야?" 화장실 가서 울었다. 10분 있다가 나왔다. 눈 부은 거 들킬까 봐 세수했다.그날 밤 집에 와서 시안을 다시 봤다. 정말 이유가 없었다. 왜 이 여백인지. 왜 이 색인지. 왜 이 서체인지. 하나도 설명 못 한다. 레퍼런스 폴더를 열었다. 10개가 저장돼 있다. 근데 왜 저장했는지 모르겠다. '예쁘다'는 이유뿐. 뭘 배운 건지. 뭘 적용한 건지. 전혀 모르겠다. 그냥 따라 한 거다. 보기 좋게. '감'으로. 선배의 파일 다음 날. 선배 파일을 몰래 열었다. 레이어 이름부터 달랐다. '여백_상단_시각적균형_40px' '메인컬러_브랜드아이덴티티_#FF5733' '헤드라인_가독성우선_Pretendard_Bold' 이름에 이유가 있었다. 가이드 문서도 있었다. A4 2장.타겟 연령층: 25-35세 여성 목적: 프로모션 인지도 컬러 근거: 브랜드 가이드 메인 컬러 활용 여백 기준: 모바일 가독성 고려 최소 32px 폰트 선택: 긴 문장 가독성 최우선모든 게 이유였다. '예쁘다'가 아니었다.바꾼 것 그다음 프로젝트. 배너 작업이 들어왔다. 시안 만들기 전에 A4 한 장 썼다. 디자인 결정 근거타겟: 30대 직장인 남성 목적: 신규 서비스 인지 톤앤매너: 신뢰감, 전문성 컬러 방향: 차분한 블루 계열 (안정감) 레이아웃: 좌측 텍스트, 우측 비주얼 (시선 흐름) 여백: 답답하지 않게 최소 48px 폰트: 고딕 계열 (가독성)한 시간 걸렸다. 근데 시안은 30분 만에 나왔다. 방향이 정해지니까 빨랐다. '이게 예쁜가?' 고민이 없었다. '이게 맞나?' 확신이 있었다. 선배에게 보여주는 시간 떨렸다. 근데 지난주랑 다른 떨림이었다. "주니야, 시안 볼까?" "네." 선배가 봤다. "음." 이번엔 30초가 안 무서웠다. "여기 여백은 왜 이렇게 했어?" "타겟이 모바일로 많이 볼 것 같아서요." "손가락으로 누르기 편하게 48px로 잡았어요." "오, 그렇구나. 컬러는?" "신뢰감 주려고 브랜드 메인 블루 썼고요." "채도는 낮춰서 부담 안 되게 했어요." "폰트는요?" "정보 전달이 중요해서 고딕으로요." "헤드라인이랑 본문 위계 확실하게 나눴어요."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이유가 명확하네." 가슴이 뛰었다. 울었던 화장실 생각났다. 일주일 전이랑 다른 나. 클라이언트 미팅 2주 뒤. 클라이언트 미팅에 따라갔다. 선배가 시안을 보여줬다. 내 시안이었다. 클라이언트가 물었다. "이 컬러 좀 밝게 하면 안 될까요?" 선배가 나를 봤다. "주니야, 설명해 줄래?"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근데 말이 나왔다. "타겟층이 30대 직장인이라서요." "너무 밝으면 가벼워 보일 수 있어요." "신뢰감이 중요한 서비스라서 이 톤으로 제안드렸습니다." 클라이언트가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이해했어요." 미팅 끝나고 선배가 말했다. "잘했어. 많이 늘었네." 화장실 가서 또 울었다. 이번엔 다른 이유로. 지금의 나 요즘은 시안 만들기 전에 쓴다. 왜 이걸 하는지. 누구를 위한 건지. 뭘 전달하려는 건지. 3줄이면 된다. 그 3줄이 있으면 모든 게 달라진다. 여백도 '왜 이 크기'가 있다. 컬러도 '왜 이 색'이 있다. 폰트도 '왜 이 서체'가 있다. 감이 아니다. 이유다. 레퍼런스 보는 방법도 바뀌었다. 예전엔 '예쁘다' 저장. 지금은 '왜 예쁜지' 분석.이 레이아웃은 시선을 어떻게 유도하나 이 컬러 조합은 왜 조화로운가 이 여백은 어떤 느낌을 주나저장할 때 메모를 단다. "대각선 구도로 시선 유도" "보색 대비로 강조점 생성" "넓은 여백으로 프리미엄 느낌" 3개월 전 나는 몰랐다. 디자인은 예쁜 게 아니라 이유라는 걸. 후배가 생겼다 며칠 전. 신입이 들어왔다. 내가 2년 전 나다. 눈 초롱초롱하고 떨린다. 시안 보여주러 왔다. "선배님, 확인 부탁드려요." 봤다. "음." "여기 여백은 왜 이렇게 했어?" 후배가 말했다. "그게... 그냥 예뻐 보여서요." 웃었다. 나였다. "괜찮아. 나도 그랬어." "근데 이거 하나만 물어볼게." "이 디자인으로 뭘 전달하고 싶어?" 후배가 생각했다. "잘 모르겠어요." "그럼 거기서부터 시작하자." "예쁜 건 그다음이야." A4 용지 한 장 줬다. 디자인 결정 근거 빈 양식. "이거 채워보고 다시 와." "30분 걸릴 거야." "근데 시안은 10분 만에 나올 거야." 후배가 자리로 돌아갔다. 나도 저랬지. '왜 이렇게 했어?'에 대답 못 했지. 그때 선배가 준 건 답이 아니었다. 질문이었다.'왜?'라는 질문. 이게 날 디자이너로 만들었다.
- 09 Dec, 2025
취업할 때 포트폴리오가 지금 봐도 부끄러운 이유
취업할 때 포트폴리오가 지금 봐도 부끄러운 이유 노션 포트폴리오를 다시 열었다 주말이다. 남자친구가 자기 취업 준비한다고 포트폴리오 봐달래서 내 거 보여줬다. 2년 전 그 노션 링크. 클릭하는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아니 이게 뭐야. 첫 페이지부터 민망하다. "안녕하세요! 열정 가득한 디자이너 이주니입니다!" 느낌표가 세 개다. 세 개. 지금 내가 쓴다면 절대 안 쓸 문장이다. 그냥 "주니어 디자이너 이주니입니다" 이렇게 쓸 거다. 사진도 문제다. 증명사진을 쓸 걸 그랬다. 뭔가 친근해 보이려고 웃는 셀카를 썼는데, 지금 보니까 그냥 어색하다. 디자인 파일에 내 얼굴이 크게 박혀 있다. 왜 이랬을까. 스크롤을 내리면 내릴수록 숨이 막힌다.첫 번째 프로젝트부터 틀렸다 카페 브랜딩 작업이다. 부트캠프 때 만든 거. 제목이 "감성 카페를 위한 브랜딩 디자인"이다. 지금 보니까 감성이 뭔지도 모르고 쓴 단어 같다. 로고부터 문제다. 커피잔 일러스트에 손글씨 폰트. 2022년에도 이미 흔한 조합이었는데, 난 이게 참신한 줄 알았다. 설명에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을 표현했습니다"라고 써놨다. 어떻게 표현했는데? 그냥 갈색 썼다고? 컬러 팔레트는 더하다. 베이지, 브라운, 아이보리. 설명은 "자연스러운 색감으로 편안함을 전달"이다. 지금 내가 이런 설명 들으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세요"라고 피드백할 텐데. 목업 이미지들. 핀터레스트에서 다운받은 무료 목업에 로고만 박았다. 각도도 다 똑같다. 마치 숙제 베껴온 초등학생 같다. 실제로 베낀 건 아니지만 느낌이 그렇다. 남자친구가 옆에서 본다. "이거 괜찮은데?" 라고 말한다. 아니야. 안 괜찮아. 네가 디자이너가 아니라서 모르는 거야.설명이 너무 없거나 너무 많거나 두 번째 프로젝트. 앱 UI 디자인이다. 배달 앱 리디자인. 이건 설명이 거의 없다. 화면 캡처 6장만 쭉 나열했다. 끝. 왜 이렇게 디자인했는지, 뭐가 문제여서 고쳤는지, 아무 설명도 없다. 그냥 "기존 디자인의 불편한 점을 개선했습니다" 한 줄. 뭘 어떻게 개선했는데? 지금 회사에서 이렇게 보고하면 팀장님이 미친다. "주니씨, 이거 왜 이렇게 했어요?" "개선했습니다." "뭘요?" "불편한 점을요." 이런 대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세 번째 프로젝트는 반대다. 설명이 너무 많다. A4로 3페이지 분량. 온갖 디자인 용어를 다 쓴다. "사용자 중심의 인터페이스", "직관적인 네비게이션", "일관된 디자인 시스템". 지금 보면 다 빈말이다. 구체적인 게 하나도 없다. "버튼 크기를 44pt에서 48pt로 키워서 터치 영역을 넓혔습니다" 같은 게 없다. 그냥 "사용성을 고려했습니다" 이런 말만 반복한다. 선배가 예전에 한 말이 생각난다. "디자인 설명에서 '감성적', '직관적' 같은 단어 쓰면 구체적으로 다시 설명해봐."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지금은 안다. 폰트 선택이 일관성이 없다 네 번째 프로젝트 보다가 발견했다. 프로젝트마다 쓰는 폰트가 다르다. 그것도 한 프로젝트 안에서도 폰트가 막 바뀐다. 첫 번째는 Noto Sans. 두 번째는 Spoqa Han Sans. 세 번째는 Pretendard. 네 번째는 또 Noto Sans. 그냥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쓴 거다. 더 웃긴 건 같은 프로젝트 안에서도 일관성이 없다는 거다. 목업에는 Noto Sans인데 설명 텍스트는 Spoqa다. 왜? 그냥 폰트 안 맞춰도 되는 줄 알았다. 지금은 절대 안 그런다. 프로젝트 시작할 때 폰트 정하고 끝까지 그걸로만 간다. 변수 설정해놓고 한 번에 바꿀 수 있게 한다. 당연한 건데, 그땐 몰랐다. 컬러도 마찬가지다. 같은 프로젝트에서 프라이머리 컬러가 #3B82F6이었다가 #2563EB이었다가 한다. Hex 코드로 보면 비슷한 파란색인데, 미묘하게 다르다. 복사 붙여넣기도 제대로 못 했다는 얘기다. 지금 회사에서는 디자인 시스템이 있다. 컬러, 타이포, 컴포넌트 다 정해져 있다. 거기서 벗어나면 선배가 바로 캐치한다. "주니야, 이거 컬러 왜 다른 거 썼어?" 처음엔 귀찮았는데, 이제는 당연하다.프로세스가 통째로 빠졌다 다섯 번째 프로젝트. 결과물만 있다. 와이어프레임이 없다. 스케치가 없다. 레퍼런스가 없다. 그냥 "짠!" 하고 완성본만 보여준다. 지금 생각하면 말이 안 된다. 디자인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아무것도 안 보인다. 실제로는 과정이 있었다. 핀터레스트 뒤지고, 레퍼런스 모으고, 종이에 스케치하고, 여러 번 수정했다. 근데 그걸 포트폴리오에 안 넣었다. 결과물만 보여주면 되는 줄 알았다. 큰 착각이었다. 지금 회사에서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주니씨, 이거 레퍼런스 뭐 봤어요?" "왜 이 레이아웃 선택했어요?" "다른 안은 없었어요?" 매번 묻는다. 그래서 요즘은 피그마에 페이지를 여러 개 만든다. 01_Research, 02_Wireframe, 03_Draft, 04_Final 이런 식으로. 과정을 다 남긴다. 나중에 설명하기도 쉽고, 내가 봐도 왜 이렇게 했는지 기억난다. 포트폴리오도 마찬가지다. 결과물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과정을 보여줘야 한다. "저는 이렇게 생각했고, 이런 시도를 했고, 이래서 이 방향으로 결정했습니다" 이게 있어야 포트폴리오다. 숫자가 하나도 없다 여섯 번째 프로젝트 설명을 보다가 깨달았다. 숫자가 하나도 없다. "사용성이 개선되었습니다", "더 효율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말만 있다. 얼마나 개선됐는데? 몇 퍼센트나 효율적인데? 클릭 수가 몇 번에서 몇 번으로 줄었는데? 아무것도 없다. 그냥 느낌만 있다. 지금은 안 그런다. 회사에서 디자인 리포트 쓸 때 숫자 필수다. "버튼 위치 변경으로 클릭률 15% 증가", "메뉴 깊이 3단계에서 2단계로 축소", "페이지 로딩 속도 0.8초 단축" 이런 식이다. 포트폴리오도 마찬가지다. 개인 프로젝트라서 실제 데이터가 없다면, 가상의 시나리오라도 만들어야 한다. "기존에는 주문까지 평균 5번 클릭이 필요했는데, 개선 후에는 3번으로 단축" 같은 거. 숫자가 있으면 설득력이 생긴다. "좋아졌어요"보다 "20% 좋아졌어요"가 낫다. 당연한 건데, 그때는 몰랐다. 아니, 알았어도 귀찮아서 안 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쓸 법한 시나리오가 없다 일곱 번째 프로젝트. 여행 앱 디자인이다. 화면은 예쁘다. 지금 봐도 나쁘지 않다. 근데 문제가 있다. 이걸 실제로 누가 쓸까? 예를 들어 메인 화면. 큰 이미지 배너가 있고, 그 밑에 추천 여행지가 있다. 깔끔하다. 근데 검색 버튼이 어디 있지? 스크롤 한참 내려야 나온다. 실제로 여행 앱 쓰는 사람들은 뭘 할까? 검색한다. "제주도 호텔" 이런 거. 근데 내 디자인은 예쁜 사진 구경하라고 만들어놨다. 사용자가 뭘 하고 싶은지는 생각 안 했다. 다른 화면도 비슷하다. 예약 화면에 달력이 있는데, 날짜 선택하기 불편하다. 손가락으로 누르기엔 영역이 작다. 예쁘게 만드느라 기능을 희생했다. 지금은 절대 안 그런다. 디자인 시작하기 전에 유저 플로우부터 그린다. 사용자가 앱 열고, 뭘 하고, 어디를 누르고, 어떻게 빠져나가는지. 그걸 다 그린 다음에 화면 만든다. 선배가 예전에 했던 말. "예쁜 디자인은 쉬워. 잘 작동하는 디자인이 어려워." 그때는 무슨 소린지 몰랐다. 지금은 매일 느낀다. 케이스 스터디가 없다 여덟 번째 프로젝트까지 다 봤다. 공통점이 있다. 전부 다 완벽하다. 문제가 없다. 시행착오가 없다. 실패가 없다. 말이 안 된다. 디자인하면서 실패 안 할 수가 없다. 처음 만든 안이 바로 최종 안일 수가 없다. 근데 내 포트폴리오는 그렇게 보인다. 마치 한 번에 완벽하게 만든 것처럼. 왜 이랬을까? 멋있어 보이려고. 실수 안 하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처음부터 다 아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완전히 잘못 생각했다. 지금은 안다. 좋은 포트폴리오는 과정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이렇게 디자인했는데, 사용자 피드백을 받아보니 이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수정했습니다." 이게 진짜다. 회사에서 면접 볼 때도 봤다. 신입 지원자 포트폴리오. 실패 과정이 있는 포트폴리오가 더 인상적이었다. "이 사람은 생각을 하는구나",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는구나" 이런 느낌. 완벽한 결과물만 보여주는 건 오히려 의심스럽다. 정말 네가 만든 거 맞아? 어디서 베낀 거 아니야? 과정이 없으니까 증명이 안 된다. 회사 프로젝트를 넣고 싶은데 2년 차가 되니까 생긴 고민. 이제 진짜 회사 프로젝트가 있다. 실제로 출시된 것들. 근데 포트폴리오에 못 넣는다. NDA 때문에. 부트캠프 프로젝트들은 이제 부끄럽다. 회사 프로젝트는 못 보여준다. 그럼 뭘 보여줘? 개인 프로젝트를 만들어야 하나? 주말에? 이미 피곤한데? 선배한테 물어봤다. "선배, 포트폴리오 어떻게 관리하세요?" 선배가 웃었다. "나도 3년 동안 안 건드렸어. 이직할 때 다시 만들 거야." 위로가 됐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다들 이렇게 사는구나. 취업하고 나면 포트폴리오 관리할 시간이 없다. 일하기도 바쁘다. 그래도 가끔 생각한다. 지금 내가 회사에서 하는 일들. 이걸 어떻게든 기록해둬야겠다. 나중에 이직할 때 쓸 수 있게. 과정이라도 캡처해두고, 배운 점이라도 메모해두고. 회사에서 쓰는 피그마 파일. 복사해서 개인 파일로 만들어두면 어떨까? NDA 위반 아닐까? 고민된다. 하지만 안 남기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 그래도 이걸로 붙었다 노트북 화면을 끄려다가 멈췄다. 이 부끄러운 포트폴리오로 나는 취업했다. 60:1 경쟁률이었다. 면접 두 번 보고 합격했다. 그때 면접관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포트폴리오 보니까 열심히 준비한 게 보이네요." 완성도를 칭찬한 게 아니라 노력을 칭찬했다. "이 프로젝트는 어떤 생각으로 진행했어요?" 질문 받았을 때,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실 처음엔 방향을 못 잡아서 헤맸어요. 레퍼런스 100개 정도 모았는데, 다 비슷해 보였어요. 그래서 제가 직접 써보기로 했어요. 배달 앱을 일주일 동안 매일 써보면서 불편한 점을 리스트업했어요." 면접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과정이 중요해요. 결과물보다 생각하는 방식이 중요하죠." 그때는 무슨 말인지 정확히 몰랐다. 그냥 위로하는 말인 줄 알았다. 근데 지금은 안다. 정말로 그렇다. 회사에서 필요한 건 완벽한 결과물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제대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 포트폴리오는 부족했다. 지금 봐도 부끄럽다. 근데 그 안에 진심은 있었다. 밤새워 만든 흔적이 있었다. 고민한 시간이 있었다. 2년이 지났다 그때와 지금. 확실히 다르다. 폰트 하나 선택할 때도 이유가 있다. 컬러 팔레트 만들 때 접근성을 생각한다. 버튼 위치 정할 때 엄지 도달 범위를 고려한다.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다 안다고 생각했다. 부트캠프 수료하고, 과제 다 하고, 자신감 있었다. 지금 신입 면접 볼 때가 있다. 포트폴리오 보면 옛날 내가 보인다. 열심히 했다. 진심이다. 근데 부족하다. 당연하다. 신입이니까. 그 사람한테 "이거 왜 이렇게 했어요?" 물으면, 당황한다. 대답을 못 한다. 나도 그랬다. "그냥요", "이게 예쁜 것 같아서요"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은 안다. 괜찮다는 걸.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걸. 2년 차도 모르는 게 많다. 10년 차 선배도 모르는 게 있다. 계속 배우는 거다. 내 포트폴리오가 부끄러운 건 좋은 신호다. 그만큼 성장했다는 뜻이다. 2년 전 내가 만든 걸 보고 "완벽한데?"라고 생각한다면, 그게 더 문제다. 성장 안 했다는 뜻이니까. 다음 포트폴리오는 언젠가 다시 만들 거다. 이직할 때쯤. 그때는 또 뭘 부끄러워할까? 지금 하는 회사 프로젝트들. 나중에 보면 또 부끄러울까? "이때는 이것밖에 못 했네" 이럴까? 아마 그럴 거다. 그래야 정상이다. 그때를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거. 과정을 기록한다. 왜 이렇게 생각했는지, 뭘 시도했는지, 어떤 피드백을 받았는지. 다 메모한다. 피그마 파일도 정리한다. 레이어 이름 제대로 짓는다. 컴포넌트 정리한다. 6개월 뒤의 나도 이해할 수 있게. 배운 것도 적는다. 노션에 페이지 하나 만들어서 매주 회고한다. "이번 주 배운 것", "다음에 시도해볼 것" 이렇게. 쌓인다. 완벽한 포트폴리오는 없다. 그냥 그 시점의 최선이 있을 뿐이다. 2년 전의 나는 그때의 최선을 다했다. 지금의 나도 최선을 다한다. 2년 뒤의 나도 그럴 거다. 부끄러운 건 나쁜 게 아니다. 증거다. 내가 성장했다는 증거. 노력했다는 증거.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2년 전 포트폴리오, 부끄럽지만 소중하다. 이게 시작이었으니까.
- 09 Dec, 2025
피그마 배우는데 포토샵이 더 편한 이유
피그마 배우는데 포토샵이 더 편한 이유 오늘도 피그마를 켰다가 포토샵을 켰다 아침 9시. 출근해서 피그마를 켰다. 배너 작업 들어가야 한다. 5분 지났다. 단축키가 생각 안 난다. 포토샵을 켰다. 이게 벌써 세 번째다. 이번 주만. 팀장님이 말씀하셨다. "이제 피그마로 작업해봐." 선배가 말했다. "요즘 피그마 안 쓰면 안 돼." 채용공고마다 써있다. "피그마 필수." 알고 있다. 머리로는. 근데 손이 포토샵을 찾는다.포토샵은 7년, 피그마는 7개월 포토샵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썼다. 과제하느라 밤샜고. 공모전하느라 울었고. 취업 포트폴리오 만들면서 손에 익었다. 7년이다. 7년. Ctrl+J 누르면 레이어 복사. Ctrl+T 누르면 자유 변형. 손이 기억한다. 생각 안 해도 된다. 피그마는 작년 여름부터. 유튜브 보면서 따라 했다. "쉽다"는 댓글들 보면서 나만 어려운가 싶었다. Auto Layout이 뭔지 몰라서 검색했다. Components 개념이 헷갈려서 또 검색했다. Frame이랑 Group 차이를 아직도 헷갈린다. 7개월 vs 7년. 당연한 거다. 근데 조급하다. 선배는 3일 만에 적응했다는데 선배 수진 누나가 말했다. "나는 피그마 배우는데 3일 걸렸어. 금방 익숙해져." 부럽다. 나는 3개월 지났는데도 매번 구글링한다. "피그마 정렬 단축키" "피그마 그리드 설정 방법" "피그마 컴포넌트 만들기" 검색 기록이 부끄럽다. 포토샵에서는 안 그랬다. 레이어 스타일 어디 있는지 안다. 마스크 어떻게 쓰는지 안다. 블렌딩 모드 언제 쓰는지 안다. 근데 피그마는 매번 찾는다. 메뉴가 어디 있는지. 이 기능은 어떻게 쓰는지. 선배는 3일. 나는 3개월인데 아직도.포토�op에서는 감이 왔는데 어제 팀장님한테 시안 보여드렸다. 피그마로 만든 거. "음... 간격이 좀 이상한데?" 간격을 봤다. 32px이었다. "32가 이상한가?" 물었다. "느낌이 좀 그래. 조정해봐." 조정했다. 28px, 30px, 36px. 모르겠다. 뭐가 맞는지. 포토샵에서는 알았다. 눈으로 보고 감으로 땄다. "아, 이 정도" 하는 느낌이 있었다. 근데 피그마는 숫자다. 8의 배수, 4의 배수, 그리드 시스템. "왜 32인지" 설명해야 한다. 설명 못 한다. 그냥 32가 예뻐 보였다. 팀장님이 물었다. "디자인 시스템 고려했어?" "...네." 거짓말이다. 생각 안 했다. 포토샵에서는 예쁘면 됐다. 피그마에서는 논리적이어야 한다. 어렵다. 협업은 좋은데 눈치 보인다 피그마의 장점. 협업. 알고 있다. 다들 그래서 쓴다고 한다. 실시간으로 같이 본다. 댓글로 피드백 받는다. 히스토리 다 남는다. 좋다. 진짜 좋다. 근데 무섭다. 내가 작업하는 거 다 보인다. 레이어 이름 대충 지으면 보인다. 시행착오하는 것도 보인다. 어제 배너 만들고 있었다. 텍스트 정렬하다가 10번 옮겼다. 왼쪽, 가운데, 오른쪽, 다시 왼쪽. 선배가 말했다. "주니야, 정렬 좀 정해. 계속 움직이네." 들켰다. 고민하는 거. 포토샵에서는 혼자 했다. 100번 고쳐도 아무도 몰랐다. 최종 파일만 보여주면 됐다. 피그마는 과정이 다 보인다. "이 사람 되게 헤매네" 하는 게 보인다. 부끄럽다.포토샵 단축키는 몸이 기억하는데 손가락이 기억한다. Ctrl+Shift+Alt+E. 레이어 병합 복사. 한 번에 누른다. 생각 안 해도. Ctrl+Shift+U. 채도 없애기. Ctrl+L. 레벨 조정. Ctrl+U. 색조/채도. 안 까먹는다. 7년 썼으니까. 피그마는 매번 찾는다. "이거 단축키 뭐더라?" 검색한다. 써먹는다. 까먹는다. 다음 날 또 검색한다. Ctrl+D가 복제인 줄 알았다. 틀렸다. Ctrl+D는 원본 선택이다. 복제는 Ctrl+D 연타. 헷갈린다. Shift 누르고 드래그하면 비율 고정. 아니다. 피그마에서는 그냥 고정이다. Shift는 다른 용도다. 포토샵 근육이 방해한다. 포토샵 손가락이 피그마를 어렵게 만든다. 새로 배워야 한다. 7년을 버려야 한다. 아깝다. 출력물은 포토샵이 맞는데 지난주 포스터 작업. 팀장님이 물었다. "피그마로 할 거야?" "...포토샵이 나을 것 같은데요." "그래, 인쇄물은 포토샵이 낫지." 안도했다. CMYK 설정. 300dpi 해상도. 출력 사이즈 mm 단위. 포토샵에서는 당연한 거다. 피그마에서는 찾아야 한다. 플러그인을. 이미지 보정도 포토샵이 낫다. 색감 조정도. 필터 효과도. "웹은 피그마, 인쇄는 포토샵" 팀장님이 말씀하셨다. 그럼 둘 다 해야 한다는 거잖아. 피그마 배운다고 포토샵 버릴 수 없다는 거잖아. 7년이 헛된 게 아니다. 위안이 된다. 근데 요즘 인쇄물 작업이 없다. 다 웹이다. 앱이다. 결국 피그마다. 컴포넌트 개념이 아직도 어렵다 Components. 피그마의 핵심이라고 한다. 버튼 하나 만들어놓으면. 100개 페이지에 쓸 수 있고. 하나만 수정하면 다 바뀐다. 좋다. 이해한다. 머리로는. 근데 만들 때가 문제다. "이게 컴포넌트가 되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복사가 나을까?" "베리언트는 언제 쓰는 거지?" 헷갈린다. 포토샵에서는 그냥 복사했다. Ctrl+J. 레이어 복사. 바꿀 거 있으면 하나씩 바꿨다. 비효율적이다. 알고 있다. 근데 확실했다. 헷갈리지 않았다. 피그마는 효율적이다. 근데 복잡하다. Master Component. Instance. Override. 용어부터 어렵다. 선배가 만든 파일 열어봤다. 컴포넌트가 20개다. 어떻게 구조 짠 건지 모르겠다. 나는 3개 만들었다가 꼬였다. 전부 Detach했다. 그냥 복사로 돌아갔다. "피그마 쓰는 의미 없잖아." 혼잣말했다. 맞다. 의미 없다. 제대로 못 쓰면. 남자친구는 "쉬운데?" 한다 남자친구 민수. 개발자다. 같은 회사. 얘는 피그마를 디자이너보다 잘 쓴다. 프로토타입 만들고. 코드 추출하고. 플러그인 설치해서 자동화하고. "별로 안 어렵던데?" 짜증 난다. "너는 개발자잖아. 논리적으로 생각하잖아." "디자인도 논리 아니야?" 말문이 막혔다. 디자인이 논리인가? 포토샵으로 할 때는 감이었다. 예쁘면 됐고. 마음에 들면 됐고. 피그마는 다르다. "왜 이렇게 했어?" 물으면 대답해야 한다. "8px 쓰는 이유가 뭐야?" 설명해야 한다. 모른다. 그냥 예뻐서. 민수가 내 파일 봤다. "레이어 이름 좀 제대로 지어. 개발할 때 헷갈려." "...알았어." Group 1, Rectangle 47, Frame 23. 기본 이름 그대로 뒀다. 포토샵에서도 그랬다. 레이어 1, 레이어 2. 근데 포토샵은 혼자 봤다. 피그마는 개발자가 본다. 달라야 한다. 습관을 바꿔야 한다. 어렵다. 결국 포토샵을 켠다 오늘도 그랬다. 피그마로 상세페이지 시작했다. 이미지 자르려고 했다. 방법을 모르겠다. 구글링했다. "피그마 이미지 크롭" "피그마 이미지 자르기" 5분 지났다. 포토샵 켰다. Marquee Tool 선택. 자르고. 저장하고. 피그마에 붙여넣었다. 30초 걸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혼잣말했다. 근데 빠르다. 확실하다. 시간 아낀다. 팀장님은 모른다. 선배도 모른다. 나만 안다. 피그마 파일인데 포토샵으로 만든 거. 죄책감 든다. 근데 어쩔 수 없다. 마감이 내일이다. 배우면서 할 시간이 없다. 언젠가는 익숙해질까 퇴근하고 유튜브 켰다. "피그마 마스터하기" "피그마 실무 팁" 구독했다. 저장했다. 주말에 봐야지. 근데 주말에 피곤하다. 월요일에 다시 미룬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알고 있다. 포토샵도 처음엔 어려웠다. 레이어 개념도 몰랐고. 마스크가 뭔지도 몰랐고. 7년 지나니까 쉬워졌다. 피그마도 그럴까? 7개월 아니라 7년 쓰면? 그때쯤이면 또 새로운 툴 나와있을 것 같다. "피그마 구세대 아니야?" "요즘은 XX 써야지." 또 배워야 한다. 또 포토샵이 편했던 것처럼. 피그마가 편했다고 말하게 될까. 상상이 안 된다.오늘도 피그마 켰다가 포토샵 켰다. 내일은 조금 덜 킬 거다. 아마도.
- 08 Dec, 2025
배너 100개 만들다 보니 생긴 일
오늘도 배너다 9시 30분. 출근하고 컴퓨터 켰다. 어제 만든 배너 피드백이 메일함에 있다. "로고 좀 더 크게, 텍스트 굵기 조정" 열었다. 수정했다. 저장했다. 이게 벌써 97번째 배너다. 세어봤다. 진짜로. 엑셀에 적어뒀다. 날짜별로.처음엔 한 개에 2시간 걸렸다. 지금은 30분. 빨라진 건지, 대충 하는 건지 모르겠다. 패턴이 보인다 배너는 다 똑같다. 정확히는, 구조가 똑같다. 상단: 로고 중간: 카피 하단: 버튼 색만 바뀐다. 문구만 바뀐다. 제품 이미지만 바뀐다. 선배가 말했다. "익숙해지면 빨라져." 맞다. 빨라졌다. 근데 이게 성장인가. 그냥 복사 붙여넣기 고수가 된 건가.포토샵 단축키는 외웠다. Ctrl+J, Ctrl+T, Ctrl+G 손가락이 기억한다. 머리는 딴 생각 중이다. 48번째에 깨달은 것 "이미지 여백 좀 더 줘." 피드백을 받았다. 여백. 처음엔 몰랐다. 뭘 더 주라는 건지. 공간이 비어 보이면 불안했다. 뭐라도 채워 넣고 싶었다. 근데 48번째 배너쯤. 여백을 주니까 로고가 살았다. 텍스트가 읽혔다. 버튼이 눌러지고 싶어 보였다. "아, 이거구나." 혼자 중얼거렸다. 선배가 지나가다 봤다. "오, 이번 건 괜찮은데?" 그날 기분이 좋았다. 퇴근길에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샀다.반복은 거짓말을 안 한다 73번째 배너. 색 조합이 이상했다. 빨강에 주황을 섞었다. 눈이 아팠다. "주니아, 이거 색 좀..." 선배가 말을 흐렸다. 수정했다. 빨강을 톤 다운시켰다. 주황 대신 베이지를 넣었다. 훨씬 나았다. "색감이 늘었네." 선배 말에 어깨가 올라갔다. 82번째. 텍스트 정렬이 삐뚤었다. 가이드 라인 없이도 보였다. 예전엔 몰랐다. 이젠 보인다. 100개를 만들면 오늘 아침. 100번째 배너를 열었다. 30분 걸렸다. 피드백 없이 통과됐다. "바로 올려도 되겠네." 기분이 이상했다. 기쁜데 허전했다. 100개를 만들면 뭐가 생길까. 실력? 포트폴리오? 아니면 그냥 숫자? 파일 폴더를 열었다. 배너_v1, 배너_v2, 배너_final 배너_final_final, 배너_진짜최종 웃겼다. 파일명이 내 성장 과정이다. 처음 배너는 레이어가 50개였다. 지금은 15개다. 정리하는 법을 배웠다. 처음엔 폰트를 10개 써봤다. 지금은 3개로 끝낸다. 고르는 법을 배웠다. 처음엔 색을 주르륵 깔았다. 지금은 메인 하나, 포인트 하나. 빼는 법을 배웠다. 반복이 가르쳐줬다. 선배 말보다, 강의보다. 100번 하니까 보였다. 그래도 불안하다 점심시간. 동기한테 톡을 보냈다. "나 요즘 배너만 만들어." "배우는 거 맞나?" 답장이 왔다. "나도 똑같음 ㅋㅋ" "근데 포폴엔 못 넣겠더라." 맞다. 배너 100개 만들었다고 포트폴리오에 쓸 순 없다. "반복 작업 고수"는 자랑이 아니다. 그래도. 레이어 정리는 빨라졌다. 색 조합 실패는 줄었다. 선배 눈치는... 여전하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디자인 계정들 봤다. 다들 멋있는 작업물을 올린다. 브랜딩, 패키지, 아이덴티티. 나는? 배너_final_final_0516.psd 웃겼다. 근데 속상하진 않았다. 101번째는 다를까 내일 또 배너를 만들 것이다. 아마 30분 걸릴 것이다. 아마 한 번에 통과될 것이다. 그럼 뭐가 달라지나. 31분짜리 배너? 더 빠른 복붙? 모르겠다. 근데 48번째에 여백을 배웠다. 73번째에 색을 배웠다. 82번째에 정렬을 배웠다. 101번째엔 뭘 배울까. 200번째엔? 파일을 닫았다. 내일 또 연다. 반복은 지루하다. 근데 거짓말은 안 한다. 손은 빨라졌다. 눈은 정확해졌다. 자신감은... 조금 생겼다. 배너 100개. 포폴엔 못 넣어도. 내 안엔 쌓였다.100개를 만들어야 101번째가 다르다는 걸 알았다.
- 07 Dec, 2025
선배가 칭찬해주면 일주일은 기분이 좋다는 게 문제다
칭찬 하나로 일주일화요일 오전 10시. 선배가 내 모니터 앞에 섰다. "이주니 씨, 이번 배너 괜찮네요." 그게 다였다. 근데 나는 그날 하루 종일 웃었다. 점심 먹으면서도 웃고. 화장실 가면서도 웃고. 퇴근길에도 웃었다. 남자친구한테 카톡했다. "선배가 괜찮대ㅠㅠ" 물음표 세 개 왔다. "그게 뭐가 그렇게 좋아?" 설명 못 했다. 나도 모르겠어서.칭찬의 유효기간수요일. 아직도 기분 좋다. 아침에 일어날 때 그 말이 들렸다. "괜찮네요." 출근길 지하철에서도 생각했다. 선배가 한 말 다시 떠올렸다. 표정, 톤, 다 기억난다. 목요일. 여전히 좋다. 작업할 때도 신난다. 평소보다 파일 열기가 덜 무섭다. 금요일. 조금 시들었다. 칭찬받은 게 벌써 3일 전이야. 근데 그 사이 새로운 칭찬은 없어. 월요일. 거의 다 사라졌다. 이제 다시 무섭다. 이번엔 또 뭐라고 할까.내가 이상한 건가 경력 2년차다. 근데 칭찬 하나에 일주일을 산다. 친구가 말했다. "너 너무 오버 아니야?" 맞아. 나도 안다. 부트캠프 동기 단톡방에 썼다. "선배가 괜찮다고 했어!" 축하 이모티콘 세 개. 근데 하나가 물었다. "그게 그렇게 기뻐?" 기쁘다고 했다. 근데 답장 치면서 생각했다. 나만 이런가. 다른 사람들은 칭찬받아도 그냥 넘기나. 남자친구는 개발자다. 코드리뷰 받는다. "깔끔하네요" 듣는다. "아 감사합니다" 하고 끝. 나는? 일주일 간다. 되새김질한다. 그 말 한마디로 버틴다.칭찬 중독문제는 알고 있다. 나는 칭찬에 중독됐다. 한 번 받으면 또 받고 싶다. 작업할 때마다 생각한다. '이번엔 칭찬받을까.' '이 정도면 괜찮다고 할까.' 그러다 피드백 받는다. "이 부분 다시 해봐요." 세상이 무너진다. 일주일 버틴 그 기분. 한 마디에 사라진다. 다시 바닥이다. 내 자존감은 선배 입에 달렸다. 선배가 웃으면 나도 웃는다. 선배가 찌푸리면 나는 운다. 이게 맞나. 2년차가 이래도 되나.혼자 서는 연습 목요일 저녁. 선배가 먼저 퇴근했다. 혼자 남았다. 작업 마무리하고 있었다. 배너 3개. 하나 완성했다. 괜찮은 것 같다. 근데 확신이 없다. 선배한테 물어볼까. 내일 아침에. "이거 괜찮을까요?" 손이 멈췄다. 또 이러네. 또 칭찬 기다리네. 파일 저장했다. 슬랙 열었다. 타이핑했다. "내일 확인 부탁드립니다." 지웠다. 그냥 올렸다. 프로젝트 폴더에. 댓글 없이. 떨렸다. 괜찮은지 모르겠어서. 근데 올렸다.칭찬 말고 다른 걸 금요일 아침. 선배가 파일 확인했다. 슬랙 왔다. "주니 씨, 어제 올린 거 확인했어요." 심장 뛴다. 뭐래. 괜찮대? "B안 좋네요. 근데 A안은 여백이 좀 아쉬워요." "C안은 폰트 사이즈 다시 봐요." ...그게 다? 칭찬 없다. '괜찮네요'도 없다. '좋아요'도 없다. 실망했다. 솔직히. 또 칭찬 기다렸거든. 근데 생각해봤다. B안 좋다고 했어. A안도 괜찮은데 여백만. C안도 폰트만. 다 쓸 수 있다는 거야. 망한 게 아니야. 이게 더 나은 건가. 칭찬 말고. 구체적인 피드백이.일주일 버티는 법 아직도 칭찬받으면 좋다. 당연히. 누가 싫어해. 근데 요즘은 달라졌다. 조금. 칭찬받으면 기쁘다. 하루는 둥둥 뜬다. 근데 다음 날부터. 그 칭찬 곱씹지 않는다. 대신 다른 걸 본다. 내가 뭘 잘했나. 왜 칭찬받았나. 다음엔 어떻게 하지. 칭찬 자체보다. 칭찬받은 이유. 그게 더 오래 간다.선배가 또 말했다 어제. 배너 3개 최종본 올렸다. 선배가 확인했다. "주니 씨, 이번 거 좋네요." 좋았다. 진짜 좋았다. 근데 예전만큼은 아니었다. 하루만 기분 좋았다. 일주일 안 갔다. 그게 슬펐나? 아니. 오히려 다행이었다. 나는 선배 칭찬으로 사는 게 아니라. 내 작업으로 사는 거니까. 칭찬은 보너스다. 메인이 아니야.아직도 떨린다. 파일 올릴 때. 근데 예전보다는 덜 떨린다. 칭찬 없어도 괜찮으니까. 피드백만 있으면 되니까. 그래도 가끔은. 선배가 "좋네요" 해주면. 여전히 기분 좋다. 일주일까지는 아니어도. 하루 정도는. 그 정도면 됐어. 2년차니까.칭찬은 좋다. 근데 칭찬으로만 버티면 안 된다. 일주일 가는 칭찬보다, 하루 가는 성장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