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 Jan, 2026
입버릇 '네, 알겠습니다'에 숨겨진 불안감
입버릇 '네, 알겠습니다'에 숨겨진 불안감 아침 9시, 슬랙 알림 출근하자마자 팀장님 슬랙. "주니씨, 오늘 3시까지 배너 3종 수정 가능할까요?" 손가락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네, 알겠습니다." 보내고 나서 캘린더를 봤다. 10시 회의, 12시 런치미팅, 2시 디자인 리뷰. 남은 시간 2시간. 배너 3종이면 최소 4시간은 걸리는데. 다시 슬랙을 봤다. 이미 읽음 표시. 지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기엔 너무 늦었다. 커피를 마셨다. 아직 9시 10분이다.회의실에서 디자인 리뷰 시간. 선배가 내 시안을 띄웠다. 큰 모니터에 내 작업물. 20명이 보고 있다. "이 부분 컨셉 설명 좀 해줄래요?" 머릿속이 하얗게 됐다. 컨셉? 그냥 레퍼런스 보고 만든 건데. "저기... 트렌디한 느낌으로..." "트렌디요? 구체적으로?" "...네." 선배가 대신 설명했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주니씨, 이해했죠?" "네, 알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30%만 알아듣었다. 나머지 70%는 메모하면서 나중에 구글링해야 한다. 회의가 끝났다. 화장실로 갔다.점심시간 동기한테 카톡 보냈다. "나 오늘 또 '네 알겠습니다' 10번은 한 것 같아" "ㅋㅋㅋ 우리 회사말 아니냐" "근데 진짜 반도 이해 못 한 거 같은데" "다들 그래. 나중에 물어보면 돼" 나중에 물어본다. 맞는 말이다. 근데 언제? 선배들 다 바쁜데. 런치미팅에서도 또 했다. "이번 프로젝트 컨셉 잡혔죠?" "네, 알겠습니다." 안 잡혔다. 컨셉이 뭔지도 모르겠다. 그냥 예쁘게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샐러드를 먹었다. 맛이 없었다. 오후 3시, 배너는 3종 중 1종 완성. 팀장님이 지나가면서 봤다. "오, 잘 되고 있네요. 3시까지죠?" "...네." 불가능하다. 2종은 시작도 못 했다. 손이 떨렸다. 마우스를 놓쳤다. 슬랙을 켰다. "죄송하지만 시간이 부족할 것 같습니다" 타이핑했다. 지웠다. "죄송합니다. 조금 늦어질 것 같습니다" 다시 썼다. 또 지웠다. 그냥 만들자. 대충이라도.5시 30분, 제출 3종 다 보냈다. 마지막 2종은 퀄리티가 영 아니다. 알고 있다. 30분 후 피드백 왔다. "2, 3번은 조금 더 다듬어주세요. 내일 아침까지 가능할까요?" "네, 알겠습니다." 또 했다. 자동 반사. 남자친구한테 카톡 보냈다. "오늘 야근" "몇 시까지?" "모르겠어. 8시?" "힘내" 고마운데 위로가 안 됐다. 저녁 7시, 혼자 사무실에 5명 남았다. 다들 야근. 2, 3번 배너를 다시 켰다. 뭘 고쳐야 할까. "조금 더 다듬어달라"는 게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여백? 폰트? 컬러? 전체 레이아웃? 선배한테 물어볼까. 아직 자리에 있다. 일어섰다가 앉았다. 또 물어보면 "왜 회의 때 안 물어봤어?" 소리 들을 것 같다. 그냥 내 생각대로 하자. 틀려도 어쩔 수 없다. 여백을 줄였다. 폰트를 키웠다. 컬러를 조금 바꿨다. 더 나아진 건지 모르겠다. 그냥 달라 보이긴 한다. 밤 9시, 퇴근길 지하철에서 슬랙 확인. 팀장님이 좋아요 눌렀다. "수고했어요" 안도감보다 불안감이 먼저 왔다. 내가 뭘 한 거지? 그냥 시키는 대로 한 건데. '알겠습니다'를 몇 번이나 말했을까. 세어보지도 못했다. 정말 알고 있었나? 반도 이해 못 한 것 같은데. 집에 도착했다.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웠다. 내일도 똑같겠지. "네, 알겠습니다" 10번쯤 더 할 것 같다. 주말, 생각 남자친구랑 카페에 왔다. "요즘 힘들어 보여" "응... 좀" "무슨 일인데?" 설명하려다가 관뒀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나는 회사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알아듣는 척하는 사람이야. 진짜 이해한 적은 거의 없어.' 이렇게 말하면 한심해 보일 것 같았다. "그냥 업무가 많아" 거짓말은 아니다. 반만 사실이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쓴맛이 강했다. 핸드폰을 켰다. 슬랙 알림 3개. 주말인데도 확인하는 나. "네, 알겠습니다" 타이핑하려다가 껐다. 월요일에 답하자. 월요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 오늘은 다르게 해보자. 모르면 물어보자. '알겠습니다' 대신 '확인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하자. 9시 도착. 선배가 말 걸었다. "주니야, 이거 오늘 중으로 가능해?" "네, 알겠습니다." 또 했다. 0.5초 만에. 계획은 무너졌다. 습관은 강했다. 책상에 앉았다. 모니터를 켰다. 슬랙 알림 7개. 하나씩 읽었다. 전부 다 "네, 알겠습니다"로 답할 내용들이었다. 첫 번째 답장을 보냈다. "네, 알겠습니다." 두 번째도. "네, 알겠습니다." 타이핑하면서 웃음이 나왔다. 비웃음 같은 것. 점심시간, 깨달음 혼자 밥 먹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왜 매번 '알겠습니다'라고 할까. 모르는데도. 시간 없는데도. 자신 없는데도. 이유는 간단했다. 거절하는 게 무서워서. "어렵습니다"라고 말하면 무능해 보일까 봐.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면 선배들이 실망할까 봐. "시간이 부족합니다"라고 하면 의지가 없어 보일까 봐. 그래서 '네'라고 한다. 일단. 나중 일은 나중의 내가 해결한다. 항상 그랬다. 근데 나중의 나는 항상 힘들었다.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고. 오후, 작은 시도 디자인 리뷰 시간. 팀장님이 물었다. "이 컨셉으로 가면 될까요?" 입이 열렸다. "네"가 나올 것 같았다. 잠깐 멈췄다.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내 목소리였다. 떨렸지만 나왔다. "타겟 연령대가 20대 초반인지 후반인지에 따라 톤앤매너가 달라질 것 같아서요." 팀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지적이네요. 20대 중반으로 잡읍시다." "네, 알겠습니다." 또 했다. 근데 이번엔 달랐다. 진짜 알아들었으니까. 회의가 끝났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작은 질문 하나. 별거 아닌데 뿌듯했다. 저녁, 남자친구와 퇴근하고 남자친구 만났다. "오늘 좀 어때?" "응... 괜찮았어." "진짜?" "응. 회의에서 질문 하나 했거든." "오 대박. 무슨 질문?" 설명했다. 별거 아닌 것 같았는데 말하니까 뿌듯했다. "잘했네. 원래 그렇게 하는 거지." "근데 나 또 '네 알겠습니다' 엄청 했어." "그래도 하나 물어본 거면 진전이잖아." 맞는 말이다. 0에서 1로 간 거니까. 내일은 2개 물어볼까. 모레는 3개. 천천히 가자. 화요일, 또 다른 시도 아침 회의. "이거 오늘까지 할 수 있어요?" 멈췄다. 캘린더를 봤다. "오늘은 어려울 것 같은데, 내일 오전까지는 가능할까요?" 선배가 웃었다. "그래, 그럼 내일 오전까지." 끝이었다. 생각보다 쉬웠다. 거절한 게 아니라 협상한 거였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점심 먹으면서 동기한테 카톡 보냈다. "나 오늘 데드라인 조정했어" "헐 대박" "응 ㅋㅋ 별거 아닌데 신기하다" "그게 제일 어려운 거임" 맞다. 제일 어려운 거 하나 했다. 한 달 후 여전히 '네, 알겠습니다'는 자주 말한다. 근데 빈도가 줄었다. 하루에 10번에서 5번으로. 그리고 진짜 알고 말할 때가 늘었다. 모르면 "확인하고 답변드릴게요"라고 한다. 시간 없으면 "일정 조율 가능할까요"라고 한다. 완벽하진 않다. 여전히 습관처럼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근데 예전처럼 죄책감은 안 든다. 조금씩 바뀌고 있으니까. 선배가 말했다. "요즘 주니 많이 성장한 것 같아." "감사합니다." '네, 알겠습니다'가 아니라 '감사합니다'라고 답했다. 작은 차이지만 큰 차이였다. 지금 여전히 불안하다. 회의 들어갈 때마다 손에 땀이 난다. 시안 보여줄 때마다 심장이 빨리 뛴다.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나서 후회할 때도 있다. 근데 알았다. 완벽해질 필요는 없다는 것. 조금씩 나아지면 된다는 것. '네, 알겠습니다' 대신 '확인해볼게요' '질문 하나 있습니다' '시간 조금 더 주실 수 있을까요' 이런 말들을 섞어가며 쓰는 것. 그게 성장이다. 오늘도 출근한다. 슬랙 알림이 뜬다. 답장하기 전에 3초 생각한다. 진짜 알아들었나. 시간은 충분한가. 모르는 게 있나. 그리고 답한다. 가끔은 '네, 알겠습니다' 가끔은 '확인해보겠습니다' 가끔은 '질문 있습니다' 섞어서.'네, 알겠습니다'는 나쁜 말이 아니다. 다만 진짜 알 때 써야 한다.
- 28 Dec, 2025
디자인 선택을 '이게 왠지 더 나을 것 같은데' 로 하면 안 되는 이유
디자인 선택을 '이게 왠지 더 나을 것 같은데'로 하면 안 되는 이유 오늘도 '왠지' 로 일했다 오전 10시. 팀장님이 배너 시안 3개 요청했다. A안, B안, C안 만들었다. 근데 뭐가 좋은지 모르겠다. 색 배치만 다른 건데 내가 봐도 비슷하다. 팀장님이 물으신다. "주니 생각엔 어떤 게 나을 것 같아?" "음... B안이요. 왠지 더 나아 보여서요." "왠지? 왜 나아 보이는데?" 대답 못 했다. 그냥 느낌이라고 말할 순 없잖아. "글자가 더 잘 보여서요..." 얼버무렸다. 팀장님은 고개만 끄덕이고 가셨다. 표정이 이상했다.점심시간에 혼자 먹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왜 B안이 좋다고 했을까. 진짜 이유가 뭐였지. 그냥 가운데 있어서? 무난해 보여서? 감각은 재능이 아니라 경험이다 선배가 커피 타러 가길래 따라갔다. "선배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디자인 선택할 때 어떻게 결정하세요?" 선배가 웃었다. "주니는 감으로 하지?" 들켰다. "네..." "나도 신입 때 그랬어. 근데 그게 문제야." 선배 말이다. 감각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고. 수천 번 봐서 쌓인 거라고. "A안이 나은 이유가 '그냥'이면 안 돼. 위계구조가 명확해서, 여백이 적절해서, 타이포가 본문과 균형 맞아서. 이런 이유가 있어야 해." 나는 그런 거 생각 안 하고 만들었다. 예쁘면 됐지 뭐. 그게 디자인 아닌가 싶었다.물어보면 무능해 보일까 봐 사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다. 왜 이 여백이 20px여야 하는지. 왜 이 색이 #FF5733이어야 하는지. 왜 제목을 왼쪽 정렬하면 안 되는지. 근데 못 물어본다. 2년차인데 이것도 모르냐고 할까 봐. '감이 없네' 또 들을까 봐. 지난주 회의 때다. 마케팅팀에서 물었다. "이 버튼 색은 왜 파란색이에요?" 나: "음... 브랜드 컬러라서요." "그럼 여기는 왜 회색이에요?" "음... 눈에 덜 띄게 하려고요." "기준이 뭐예요?" 대답 못 했다. 그냥 했다. 선배가 대신 설명해줬다. "주요 액션은 브랜드 컬러, 부가 액션은 중성 톤. 위계에 따라 색상 강도를 조절했습니다." 아, 그런 거였구나. 나는 그냥 '이게 이쁘니까' 했는데.질문하면 무능해 보인다는 생각. 틀렸다. 근거 없이 일하는 게 무능한 거다. 클라이언트는 '왠지'를 안 산다 저번 달 외주 작업. 카페 브랜딩이었다. 로고 시안 5개 만들었다. 사장님이 물으셨다. "이 로고는 왜 이렇게 만드셨어요?" "감성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손글씨체 썼구요, 컬러는 따뜻한 느낌 주려고 브라운 톤으로..." "그런데 왜 손글씨체가 감성적인가요?" "음... 사람 손으로 쓴 거라서요?" "우리 카페가 감성적이어야 하는 이유는요?" 말문이 막혔다. 집에 와서 혼자 생각했다. 사장님 고객층: 30대 직장인. 위치: 오피스 밀집 지역. 니즈: 빠른 포장, 일 하면서 마시기 좋은 커피. 감성 카페? 아니잖아. 나는 내 취향으로 만들었다. 근거 없이. 결국 수정 3번 했다. 마지막엔 선배가 같이 들어갔다. 사장님이 선배 설명 듣고 바로 결정하셨다. "이 폰트는 가독성이 높고 전문적으로 보입니다. 컬러는 차분하면서도 프리미엄 느낌을 줍니다. 타겟층인 직장인들이 신뢰할 수 있는 디자인입니다." 같은 디자인이었다. 설명만 달랐다. 질문하지 않으면 2년차가 10년 돼도 신입이다 어제 점심시간. 같은 부트캠프 출신 친구를 만났다. 얘도 2년차. 근데 일하는 게 달랐다. "나 요즘 선배한테 하루에 10개는 물어봐." "진짜? 뭘?" "다. 왜 이 간격이 8px인지, 왜 이 색 썼는지, 왜 이 레이아웃 선택했는지." "귀찮아하지 않아?" "처음엔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선배가 그러는데, 근거 있게 물어보면 오히려 좋대. '얘 생각하면서 일하네' 이렇게 보인대." 나는 반대로 했다. 혼자 고민하고, 감으로 결정하고, 피드백 받으면 수정만 하고. 친구가 말했다. "주니야, 우리 경력 2년이야. 2년 동안 감으로만 일하면 10년 돼도 신입이야. 근데 2년 동안 이유를 배우면 5년차처럼 일해." 그 말 듣고 울컥했다. 맞는 말이었다. 이번 주부터 바꾼 것 월요일. 출근해서 노션에 페이지 만들었다. 제목: "내가 한 디자인 선택과 이유" 매일 기록한다.오늘 어떤 선택을 했는지 왜 그렇게 했는지 근거가 있었는지 없었다면 뭐가 필요했는지화요일. 상세페이지 작업 중 막혔다. 제품 이미지를 왼쪽에 둘까 오른쪽에 둘까. 전엔 그냥 '왼쪽이 나을 것 같은데' 하고 했다. 이번엔 선배한테 물었다. "선배님, 제품 이미지 배치 여쭤봐도 될까요? 왼쪽과 오른쪽 중 어떤 게 나을까요?" 선배가 물었다. "주니는 어떻게 생각해?" "Z패턴으로 보면 왼쪽이 먼저 보일 것 같은데, 그럼 텍스트가 나중에 읽혀서 구매 유도가 약할까 싶어서요." 선배가 웃었다. "오, 생각하고 물어보네?" "네... 맞는지 모르겠어서요." "맞아. 이커머스는 보통 제품 이미지 오른쪽에 둬. 왼쪽에 핵심 정보와 버튼 먼저 보여주는 거지. 근데 제품이 비주얼로 승부하는 거면 왼쪽도 괜찮아." 10초 대화로 2시간 고민 끝났다. 근데 중요한 건 다른 거다. 선배가 나를 다르게 봤다. '생각하는 디자이너'로. 수요일. 팀 회의. 앱 리뉴얼 디자인 발표. 내 차례가 왔다. "이번 홈 화면은 카드 레이아웃으로 구성했습니다. 리스트보다 카드가 나을 것 같아서..." 말하다가 멈췄다. '나을 것 같아서'를 또 썼다. 다시 시작했다. "리스트보다 카드를 선택한 이유는, 타겟 유저가 20대 후반이고, 인스타그램, 핀터레스트 같은 카드형 UI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콘텐츠가 이미지 중심이라 카드 형태가 정보 전달에 효과적입니다." 팀장님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좋아요. 계속해보세요." 발표 끝나고 선배가 귓속말했다. "많이 늘었네. 요즘 뭐해?" 매일 이유를 찾았다고 했다. 선배가 웃었다. "그래, 그게 디자인이야." 감각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지금 깨달았다. '디자인 감각'은 타고나는 게 아니다. 수천 번 '왜'를 묻고 답하면서 만들어지는 거다. 선배는 감으로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근데 그게 아니다. 너무 많이 물어보고 생각해서 이제 자동으로 나오는 거다. 나는 2년 동안 '왜'를 건너뛰었다. 그래서 아직도 신입처럼 일한다. 어제 저녁. 개인 작업 중 색 선택을 못 하고 있었다. 민트색이냐 네이비냐. 전엔 '민트가 예쁘니까' 했을 거다. 이번엔 물었다. 나한테. "이 페이지의 목적이 뭐지?" 포트폴리오 소개. 전문성 전달. "민트는 어떤 느낌을 주지?" 젊고, 친근하고, 부드럽다. "네이비는?" 차분하고, 믿음직하고, 전문적이다. 네이비를 선택했다. 이유가 있어서. 질문하는 게 무능이 아니라 성장이다 오늘 아침. 출근해서 선배한테 말했다. "선배님, 앞으로 제가 자주 물어봐도 될까요?" "응, 당연하지." "근거 없이 일하는 게 싫어서요. 매번 왜 이렇게 했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선배가 진지하게 봤다. "주니야, 그게 프로야. 클라이언트가 '왜'를 물어봤을 때 '왠지요'라고 답하는 디자이너는 프로가 아니야." 맞다.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은 모든 픽셀에 이유가 있어야 한다. 예쁘다고 끝이 아니다. 왜 예쁜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2년 차가 배워야 하는 건 툴이 아니라 언어다 피그마 잘 쓰는 거 중요하다. 포토샵 능숙한 거 중요하다. 트렌드 따라가는 것도 중요하다. 근데 더 중요한 게 있다. 내 선택을 설명하는 언어. "이게 예쁘니까요" → "위계구조가 명확해서 정보 전달이 효과적입니다" "왠지 이게 나아요" → "타겟 유저의 사용 패턴에 부합합니다" "그냥 이렇게 했어요" →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일관성을 유지했습니다" 같은 디자인이다. 설명만 다르다. 근데 설명이 디자인을 완성한다. 이번 주 목표. 질문 10개 하기. 모든 선택에 이유 달기. '왠지' 안 쓰기."감각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거다. 매일 '왜'를 물어보면서."
- 27 Dec, 2025
월요일 오전 9시, 선배가 준 피드백을 보는 순간
월요일 오전 9시, 선배가 준 피드백을 보는 순간 9시 3분 출근했다. 회사 건물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심장이 두근거렸다. 금요일 저녁 6시에 슬랙으로 보낸 시안. "확인 부탁드립니다." 주말 동안 답장 없었다. 그게 더 무섭다.자리 앞에서 가방을 놓았다. 노트북을 켰다. 로그인 화면이 뜬다. 손가락이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떨린다. 왜 이렇게 떨리지. 옆자리 선배가 인사했다. "주말 잘 보냈어?" "네, 잘 보냈습니다." 거짓말이다. 토요일은 그 시안 생각하면서 유튜브만 봤다. 일요일은 "혹시 너무 이상한 거 아닐까" 생각하면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슬랙을 연다 알림 23개. 스크롤을 내린다. 천천히. 팀 공지 2개. 개발팀 질문 4개. 그리고. 김지은 선배 멘션 1개. 클릭하기까지 5초. "@이주니 시안 확인했어. 수정 사항 파일에 코멘트 남겼으니까 월요일에 확인해봐." 파일을 연다.빨간 말풍선의 개수 첫 화면. 빨간 코멘트 3개. 스크롤. 5개 더. 또 스크롤. 4개 더. 총 12개다. 심장이 내려앉는다. 하나씩 읽는다 "여기 여백이 너무 좁아. 답답해 보여." 맞다. 나도 그랬다. 근데 왜 안 고쳤지. "이 색상은 브랜드 컬러랑 안 맞아." ...브랜드 가이드를 안 봤다. "타이포 위계가 애매해. 뭐가 중요한 건지 모르겠어." 이것도 맞다. "전체적으로 깔끔한데, 포인트가 없어." 깔끔하다는 건 칭찬인가. 아닌가. 읽으면서 얼굴이 뜨거워진다. 화장실 가고 싶다.6번째 코멘트 "주니야, 이건 왜 이렇게 배치했어? 의도가 있었어?" 이 질문이 제일 무섭다. 의도? 그냥... 예쁠 것 같아서. 참고 사이트에서 봤던 거 같아서. 근데 그걸 어떻게 말해. "예쁠 것 같아서요"라고 하면 "디자인은 예쁜 게 목적이 아니야"라고 할 거다. 작년에 한 번 들었다. 9번째 코멘트 "여기는 좋아. 이 느낌으로 전체를 맞춰봐." 읽고 또 읽는다. 좋다고 했다. "이 느낌으로." 뭐가 좋았던 걸까. 색상? 레이아웃? 여백? 모르겠다. 그냥 우연히 잘된 거다. 다시 만들라고 하면 못 만든다. 마지막 코멘트 "수고했어. 방향은 괜찮으니까 수정해서 다시 보여줘." "수고했어." 이 한 마디에 숨이 좀 쉬어진다. 망한 건 아니구나. 고칠 수 있는 거구나. 마우스를 움직인다. 파일을 저장한다. "시안_v2_수정중.fig" 10시 47분 커피를 타러 간다. 복도에서 박민주 선배를 만났다. "주니야, 월요일이네." "네..." "피드백 받았어?" "네. 12개요." "오, 그 정도면 괜찮은데? 나 처음엔 30개 받았어." 30개. 갑자기 12개가 적어 보인다. 수정을 시작한다 첫 번째 코멘트부터. "여백이 너무 좁아." 20px를 40px로. 두 번째. "색상이 안 맞아." 브랜드 가이드를 연다. 컬러 코드를 복사한다. 세 번째. "타이포 위계가 애매해." 제목 24px, 본문 16px. 좀 더 차이를 준다. 제목 28px. 하나씩 고친다. 시간이 지나간다. 12시 20분 점심시간이다. 근데 집중이 된다. 조금 더 하고 가자. 6번째 코멘트까지 수정 완료. 절반 왔다. 저장한다. "시안_v2_수정중_1220.fig" 뭔가 뿌듯하다. 밥 먹으러 간다. 오후 3시 11개 수정 완료. 마지막 하나. "여기는 좋아. 이 느낌으로 전체를 맞춰봐." 30분 동안 그 '느낌'을 찾으려고 했다. 색상인가 싶어서 다른 곳에도 적용했다. 이상하다. 레이아웃인가 싶어서 배치를 바꿨다. 더 이상하다. 여백인가 싶어서 띄웠다. 아니다. 선배 자리로 "저기, 지은 선배님." "응?" "9번 코멘트에서... 이 느낌이라는 게 정확히 뭘까요?" 선배가 내 모니터를 본다. "아, 여기? 여기는 정보가 명확하게 보이잖아. 시선 흐름이 자연스럽고. 이 정도 여백이 있으니까 답답하지 않고." "아..." "나머지는 정보를 다 넣으려고 해서 빡빡해 보여. 우선순위를 정리해봐. 뭐가 제일 중요한지." "네, 알겠습니다." 자리로 돌아온다. 정보의 우선순위 제일 중요한 건 제목. 그 다음은 핵심 내용. 부가 설명은 작게. 다시 배치한다. 덜어낸다. 더 덜어낸다. 1시간 후. 보인다. '이 느낌'이 보인다. 저장한다. "시안_v2_수정완료.fig" 5시 42분 슬랙을 연다. "@김지은 수정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전송. 심장이 또 두근거린다. 근데 아까 아침이랑은 다르다. 조금 덜 무섭다. 5시 58분 답장이 왔다. "오 훨씬 나아졌다. 이 방향으로 가자. 내일 오전에 다른 페이지도 이 톤으로 맞춰서 보여줘." "네, 감사합니다!" 답장을 보냈다. 퇴근 2분 전인데 기분이 좋다. 퇴근길 엘리베이터를 탄다. 아침에 탔던 그 엘리베이터. 그때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지금은 괜찮다. "훨씬 나아졌다." 이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핸드폰을 꺼낸다. 남자친구한테 카톡을 보낸다. "오늘 피드백 12개 받았는데 다 고쳤어ㅋㅋㅋ" "오 대단한데?" "선배가 나아졌대" "봐봐 잘했잖아" 기분이 좋다. 집에 와서 샤워를 했다. 배달 음식을 시켰다. 노트북을 켰다. "내일 오전에 다른 페이지도." 미리 좀 해놓을까. 30분만. 파일을 연다. 다른 페이지를 복사한다. 오늘 배운 '그 느낌'을 적용한다. 여백을 넓힌다. 우선순위를 정리한다. 시선 흐름을 만든다. 1시간이 지났다. 근데 재밌다. 10시 47분 3개 페이지를 수정했다. 내일 아침에 확인하고 보내야지. 저장한다. 노트북을 끈다. 침대에 눕는다. 오늘 아침 9시가 생각난다. 12개의 빨간 코멘트. 그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근데 해냈다. 하나씩 고쳤다. 선배한테 물어봤다. 답을 찾았다. 내일 아침이 조금 기대된다. 월요일 밤 피드백은 무섭다. 특히 주말 동안 쌓인 피드백은 더 무섭다. 빨간 글씨를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다. "이렇게 많이 틀렸나" 싶어서 속상하다. 근데. 피드백이 없으면 더 무섭다. "이거 뭐야"라는 말 한 마디 없이 그냥 "다시 해봐"라고만 하면 뭘 고쳐야 할지 모른다. 12개의 코멘트는 12개의 힌트다. "여기가 이상해" 라고 말해주는 거다. "이렇게 하면 돼" 라고 알려주는 거다. 처음엔 몰랐다. 2년 차가 되니까 조금 안다. 빨간 코멘트를 두려워하지 말자. 하나씩 읽고, 하나씩 고치면 된다. 다 고치고 나면 나아진 내가 있다.월요일 아침은 여전히 무섭지만, 이제는 조금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 26 Dec, 2025
신림동 원룸에서 일어나는 아침 루틴의 시작
신림동 원룸에서 일어나는 아침 루틴의 시작 7시 30분, 알람 알람이 울렸다. 세 번째 알람이다. 7시에 첫 알람. 7시 15분에 두 번째. 그리고 지금. 손을 뻗어 폰을 잡았다. 눈을 비비고 화면을 봤다. 인스타그램 알림 2개. 디자인 계정. 팔로워가 하나 늘었다. 33명. 이불을 걷어찼다. 추웠다. 원룸은 좁다. 침대에서 일어나면 책상이 보인다. 책상 위에 노트북. 어젯밤에 켜둔 채로 잤다. 피그마 화면이 그대로다. 주말에 만들던 포트폴리오. 아직 30%도 안 됐다. 창문 밖을 봤다. 신림동 아침. 회색 건물들. 빨래 너덜거리는 옥상들. 저 멀리 관악산이 보인다. 45만원 월세. 보증금 500만원은 부모님이 내주셨다. 미안했다.샤워 10분 샤워실이 좁다. 팔 벌리면 벽에 닿는다. 뜨거운 물을 틀었다. 온수가 나오기까지 2분. 그동안 춥다. 머리를 감았다. 샴푸 거품이 눈에 들어갔다. 따가웠다. 어제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주니 씨, 이 배너 여백이 좀 이상해요." 팀장님이 말씀하셨다. 내 화면을 보시면서. "네, 수정하겠습니다." 뭐가 이상한지 몰랐다. 그냥 그렇게 대답했다. 돌아가서 30분 동안 여백을 조정했다. 10px씩 옮겨봤다. 20px도 해봤다. 결국 처음으로 돌아갔다. 다시 보여드렸다. "네, 이제 괜찮네요." 뭘 고친 건지 나도 모르겠다. 샤워 끝. 수건으로 머리를 감쌌다. 거울을 봤다. 부은 얼굴. 다크서클. 26살.아침 준비 30분 옷장을 열었다. 옷이 많지 않다. 검은색 티셔츠. 회색 가디건. 청바지. 항상 비슷하다. 화장대 앞에 앉았다. 거울이 작다. 얼굴 반쪽만 보인다. 톤업 크림. 파운데이션. 아이브로우. 립밤. 회사 가는 화장. 20분이면 된다. 대학생 때는 1시간 걸렸다. 지금은 아침이 아깝다. 폰을 봤다. 8시 10분. 남자친구한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점심 같이?" 회사 개발팀 김민준. 1년 됐다. 처음 만난 건 회사 MT. 취하지도 않았는데 떨렸다. 답장이 왔다. "오늘 미팅 있어. 내일은?" "ㅇㅋ" 짧게 답했다. 서운하지 않은 척. 토스트를 꺼냈다. 냉장고에 잼이 있다. 딸기잼. 엄마가 싸주신 거. 물을 끓였다. 커피를 탔다. 맥심 모카골드. 하루에 세 개 먹는다.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없었다. 그래도 씹었다. 책상을 봤다. 노트북 옆에 쌓인 책들. 『디자이너의 생각법』 『UX/UI 디자인 입문』 『타이포그래피 교과서』 다 읽지 못했다. 처음 10페이지까지만. 노트북을 열었다. 피그마 화면이 떴다. 어젯밤에 만들던 포트폴리오. 메인 페이지 레이아웃. "이 정도면 괜찮나?" 혼잣말을 했다. 대답은 없다.8시 40분, 출근 준비 가방을 챙겼다. 노트북. 충전기. 마우스. 텀블러. 텀블러는 회사에서 커피 받으려고. 자판기 커피도 돈이다. 지갑을 확인했다. 카드 한 장. 현금 만 원. 이번 주 생활비. 남은 게 이것뿐이다. 월급날은 25일. 오늘은 21일. 4일 남았다. 월급 250만원. 월세 45만원. 통신비 5만원. 교통비 8만원. 식비 30만원. 부모님 용돈 20만원. 남는 건 142만원. 거기서 데이트 비용. 옷. 화장품. 책. 저축은 한 달에 50만원 목표. 실제로는 30만원. 신발을 신었다. 운동화. 흰색. 더러워졌다. 거울을 봤다. 괜찮다. 회사 가기엔 충분하다.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는 좁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계단을 내려갔다. 엘리베이터는 없다. 4층.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차다. 신림역까지 걸어간다. 10분. 길을 걸으면서 폰을 봤다. 인스타그램 디자인 계정. 어젯밤에 올린 포스트. 좋아요 5개. 부트캠프 동기 3명. 선배 1명. 엄마 1명. 괜찮다. 처음이니까. 신림역 2호선. 사람이 많다. 출근 시간. 지하철을 탔다. 빈자리 없다. 손잡이를 잡았다. 회사는 강남역. 30분 걸린다. 이어폰을 꺼냈다. 유튜브를 켰다. "왕초보를 위한 피그마 오토레이아웃" 구독자 2만 명. 조회수 8천. 재생했다.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오토레이아웃의 기초에 대해..." 눈을 감았다. 집중했다. 주변 소음은 사라졌다. 9시 10분, 회사 도착 회사 건물. 10층짜리. 낡았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7층.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프론트에 인사했다. 미소를 지었다. 받아주셨다. 사무실 문을 열었다. 디자인팀 자리. 선배 두 명이 이미 와 있었다. 김서연 선배. 5년차. 팀에서 제일 잘한다. 박지훈 선배. 3년차. 친절하다. "주니 씨, 왔어요?" 지훈 선배가 말했다. "네, 안녕하세요." 자리에 앉았다. 책상은 깨끗하다. 어제 정리했다. 맥북을 켰다. 부팅하는 동안 물을 마셨다. 슬랙을 열었다. 메시지 7개. 팀장님: "오늘 회의 10시입니다" 서연 선배: "주니 씨, 어제 보낸 파일 확인했어요" 지훈 선배: "점심 뭐 먹을까요" 피그마를 켰다. 어제 작업하던 파일. 메인 배너. 상세페이지. 썸네일 3종. 서연 선배가 피드백 남겨놓으셨다. "이 폰트 두께 조금 더 볼드하게" "여기 색상 톤 맞춰주세요" "이미지 크롭 다시" 10개. 피드백이 10개다. 한숨을 쉬었다. 작게. 들리지 않게. 마우스를 잡았다. 레이어를 선택했다. "폰트 두께... 볼드..." 수정을 시작했다. 창밖을 봤다. 강남 빌딩들. 차들. 사람들. 저 중에 나처럼 떨리는 사람이 몇 명일까. 다시 화면을 봤다. 작업에 집중했다. 저녁, 집으로 퇴근은 6시 30분에 했다. 정시는 6시. 그런데 다들 안 간다. 나도 못 간다. 서연 선배가 7시에 나가셔서 따라 나왔다. "먼저 가세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지하철을 탔다. 강남역에서 신림역. 다시 30분. 사람이 더 많다. 퇴근 시간. 서서 갔다. 다리가 아프다. 폰을 봤다. 남자친구 메시지. "저녁 먹었어?" "아직. 너는?" "회사에서 먹었어. 일찍 들어가" "ㅇㅋ" 창밖을 봤다. 어두워졌다. 신림역에 내렸다. 역 앞 편의점. 들어가서 삼각김밥 2개. 바나나우유 1개. 4500원. 카드로 긁었다. 집에 도착했다. 4층. 계단. 문을 열었다. 어둡다. 불을 켰다.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벗었다.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흰색. 5분 동안 그냥 누워 있었다. 일어났다. 샤워를 했다. 10분.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맨투맨. 츄리닝. 삼각김밥을 먹었다. 참치마요. 맛있었다. 책상 앞에 앉았다. 노트북을 켰다. 피그마를 열었다. 포트폴리오 파일. "오늘은 뭘 만들지." 메인 페이지는 거의 끝났다. 프로젝트 페이지를 시작해야 한다. 회사에서 한 작업을 넣을까. 아니면 개인 작업을 만들까. 고민했다. 10분. 일단 레이아웃부터. 그리드를 깔았다. 12컬럼. 타이포그래피 스타일을 정했다. Pretendard. 16px. 1.6 line-height. 색상 팔레트를 만들었다. 참고 사이트를 열었다. Behance. Pinterest. Dribbble. 좋은 걸 저장했다. 무드보드 폴더에. 시계를 봤다. 밤 10시. 아직 할 수 있다. 유튜브를 켰다. "실무 디자이너의 포트폴리오 만들기". 재생했다. 따라 했다. 30분 지났다. 눈이 침침하다. 커피를 탔다. 맥심 모카골드. 오늘 세 번째. 다시 작업했다. 자판을 두드렸다. 마우스를 움직였다. 레이어를 복사했다. 정렬했다. 색을 바꿨다. "이게 맞나?" 혼잣말을 했다. 확신이 없다. 그래도 계속했다. 밤 12시. 포트폴리오 진행률 35%. 저장했다. 노트북을 덮었다. 침대에 누웠다. 폰을 봤다. 인스타그램. 팔로우한 디자이너들 피드. 멋진 작업들. 좋아요 수백 개. 부러웠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알람을 맞췄다. 내일 아침 7시. 눈을 감았다. 어둠이 왔다.내일도 7시 30분에 일어난다. 그리고 똑같은 하루. 그래도 괜찮다. 포트폴리오가 1%씩 늘어가니까.
- 25 Dec, 2025
상세페이지 배너 배너 반복 - 이게 성장인가요?
오늘도 상세페이지 월요일 9시 30분. 슬랙에 메시지가 떴다. "주니씨, 이번 주 상세페이지 5개 부탁드려요. 레퍼런스 공유했어요." 레퍼런스를 열었다. 지난주에 만든 거랑 똑같다. 사이즈만 다르다. 1200x3000에서 1200x3500으로. 포토샵을 켰다. 지난주 파일을 복사했다. "최종_최종2_진짜최종_1204" 이걸 "최종_1211"로 바꿨다. 이미지 교체. 텍스트 수정. 정렬 확인. 저장. 다음 파일. 30분 만에 첫 번째 완성.점심시간까지 3개를 더 만들었다. 급식 먹으면서 생각했다. 이게 성장인가. 숫자로 본 2년 입사한 게 2023년 1월이다. 지금 2024년 12월. 만든 상세페이지: 약 240개 만든 배너: 약 480개 리사이즈 작업: 세기 싫다 포트폴리오에 넣을 만한 건: 2개 이직 준비 중인 부트캠프 동기가 물었다. "너 최근 작업 중에 뭐 보여줄 만해?" 말이 안 나왔다. 상세페이지는 다 비슷하다. 배너도 다 비슷하다. 회사 브랜딩 가이드를 따르니까. "일은 많이 했는데 보여줄 게 없네." 동기가 웃었다. "나도."웃을 일이 아닌데 웃었다. 선배가 말했다 목요일 오후. 선배한테 시안을 보여드렸다. "주니야, 이거 지난주랑 똑같은데?" "네... 레퍼런스가 똑같아서요." 선배가 모니터를 봤다. 한참 봤다. "그럼 다르게 만들어봐. 레이아웃이라도." "...네?" "같은 거 100번 만드는 게 능력이 아니야. 더 나은 방법 찾는 게 능력이지." 회의실에서 나왔다. 다시 앉았다. 더 나은 방법. 뭐가 더 나은 건데. 레퍼런스는 이미 좋다. 클릭률도 괜찮다고 했다. 바꿀 이유가 없다. 그런데 왜 바꾸래.피그마를 켰다. 유튜브에서 본 레이아웃을 따라 해봤다. 2시간 걸렸다. 평소의 4배다. 선배한테 다시 보여드렸다. "오, 괜찮은데? 이게 낫다." 2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칭찬이 들어서. 그런데 금요일에 대표님이 말했다. "이전 버전이 더 깔끔한데요? 원래대로 해주세요." 반복의 의미 토요일. 카페에서 포트폴리오를 정리했다. 2년 동안 만든 파일을 쭉 봤다. 2023년 3월 작업: 디테일이 엉망이다. 여백도 들쭉날쭉. 2023년 9월 작업: 많이 나아졌다. 정렬이 깔끔해졌다. 2024년 6월 작업: 속도가 빨라졌다. 퀄리티는 유지. 2024년 12월 작업: ...똑같다. 6월이랑. 성장이 멈췄다. 아니, 성장한 건 맞다. 작업 속도. 파일 정리. 커뮤니케이션. 그런데 디자인은. 같은 걸 빠르게 만드는 사람이 됐다. 새로운 걸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핸드폰을 봤다. 디자인 계정 팔로워 32명. 3개월째 그대로다. 올리는 것도 회사 상세페이지 일부분. 리액션 없다. "이런 거 누가 봐." 혼잣말이 나왔다. 유명한 디자이너 계정을 봤다. 팔로워 8만. 올린 작업들: 브랜딩, UI, 타이포, 굿즈. 다 다르다. 다 새롭다. 다 멋있다. 나는 상세페이지 240개. 비교가 됐다. 팀장님 면담 화요일. 팀장님이 불렀다. "주니씨, 2년 됐죠? 내년 목표 같이 얘기해봐요." 준비 안 했다. 그냥 말했다. "더 다양한 작업 해보고 싶어요." "어떤 거요?" "상세페이지 말고... 브랜딩이나, 메인 비주얼 같은 거요." 팀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면 지금 작업부터 잘해야죠. 상세페이지도 브랜딩이에요." "...네?" "매번 같은 레이아웃 쓰는 게 게으른 거예요. 같은 조건에서 더 나은 걸 찾는 게 진짜 실력이고." 선배가 했던 말이랑 같다. "지금 주는 일 대충하고 다른 거 하고 싶다는 건, 순서가 바뀐 거예요." 할 말이 없었다. "다음 주부터 상세페이지 하나를 A/B 테스트 해봐요. 두 버전 만들어서 클릭률 비교하는 거. 어떤 게 더 잘 나오는지." "...해도 돼요?" "당연하죠. 제안해봐요. 데이터 쌓이면 그게 포트폴리오예요." 회의실에서 나왔다. 상세페이지가 다르게 보였다. 갑자기. A/B 테스트 제안 수요일. 마케팅팀 회의. 손을 들었다. 떨렸다. "저, 제안 하나 해도 될까요?" 마케팅 팀장이 봤다. "어, 주니씨? 어떤 거요?" "상세페이지를 두 버전 만들어서 클릭률 비교해보면 어떨까요. 레이아웃 테스트 같은 거요." "...오?" 마케팅 선임이 관심을 보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요?" 준비한 화면을 공유했다. 어젯밤에 2시간 걸려서 만든 자료. 버전 A: 기존 레이아웃 (세로형, 정보 위주) 버전 B: 새 레이아웃 (카드형, 비주얼 위주) "2주 돌려보고 클릭률이랑 체류 시간 비교해보면, 뭐가 더 효과적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마케팅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데요? 이거 개발 공수 얼마나 들어요?" 개발팀 선배(남자친구)가 말했다. "이 정도면 하루?" "그럼 다음 주 상품 출시할 때 해봐요. 주니씨가 두 버전 만들고." 회의 끝나고 자리로 돌아왔다. 선배가 톡을 보냈다. "굿. 이게 성장이야." 2주 후 A/B 테스트 결과가 나왔다. 버전 B(새 레이아웃): 클릭률 12% 높음, 체류시간 40초 더 긺. 슬랙에 마케팅 팀장이 올렸다. "주니씨 제안한 레이아웃이 훨씬 낫네요. 다음부터 이걸로 가시죠." 팀 칭찬. 처음이다. 선배가 자리로 왔다. "야, 너 이거 외부 공모전에 내봐. '데이터 기반 디자인 개선 사례'로." "...공모전이요?" "응. 포트폴리오감 아니야, 이거?" 맞다. 같은 상세페이지인데, 이번엔 다르다. "반복 작업을 개선한 과정"이 있다. "결과 데이터"가 있다. 그날 저녁. 남자친구랑 퇴근했다. "오늘 기분 좋아 보인다." "응. 내가 제안한 게 받아들여져서." "당연하지. 좋은 아이디어였어." "근데 있잖아, 나 계속 똑같은 것만 만드는 줄 알았거든." "맞잖아. 상세페이지 매일 만들잖아." "근데 그 안에서도 다르게 할 수 있는 거였어. 내가 안 찾아본 거지." 남자친구가 웃었다. "그걸 이제 알았네." 반복과 숙련 사이 금요일 저녁. 개인 작업 시간. 공모전 포트폴리오를 정리한다.문제 인식: 같은 레이아웃 반복 → 개선점 찾기 어려움 가설 설정: 비주얼 중심 레이아웃이 더 효과적일 것 실행 과정: A/B 테스트 제안 및 진행 결과: 클릭률 12% 개선, 체류시간 40초 증가 학습: 반복 업무 안에서도 데이터 기반 개선 가능쓰고 보니 그럴듯하다. 2주 전까지만 해도 "의미 없는 반복"이었다. 지금은 "개선 과정이 담긴 사례"다. 같은 일인데 다르게 보인다. 포트폴리오 파일 이름을 지었다. "240번의 상세페이지가 가르쳐준 것" 부트캠프 동기 단톡방에 올렸다. "나 공모전 낸다." 반응이 빨랐다. "오 뭔데?" "주니 드디어?" "보여줘봐" 초안을 공유했다. "미쳤다. 이거 당선감인데?" "데이터까지 있으면 진짜 강한데." "나도 회사에서 이런 거 해봐야겠다." 핸드폰을 내려놨다. 인스타 디자인 계정을 열었다. 팔로워 32명. 이번 주 작업을 올렸다. A/B 테스트 과정을 정리해서. 30분 만에 좋아요 12개. 댓글 2개. "오 이런 접근 좋네요" "주니어가 이런 제안까지 하다니, 멋있어요" 작다. 그래도 반응이 있다. 월요일 아침 출근했다. 슬랙을 켰다. "주니씨, 이번 주 상세페이지 4개 부탁드려요." 레퍼런스를 열었다. 지난달에 만든 거랑 비슷하다. 예전 같으면 한숨 나왔다. 지금은 다르다. "기존 레퍼런스 참고해서, 개선안도 하나 만들어볼게요. 비교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마케팅 선임이 답했다. "오 좋죠. 기대할게요." 포토샵을 켰다. 그리고 피그마도 켰다. 기존 방식으로 하나. 새 시도로 하나. 시간은 두 배 걸린다. 괜찮다. 선배가 지나가다 봤다. "두 개 만들어?" "네. 비교하려고요." "굿. 그게 맞아." 점심시간. 급식 먹으면서 생각했다. 여전히 상세페이지를 만든다. 매일. 여전히 반복이다. 그런데 다르다. "같은 걸 빠르게"에서 "더 나은 걸 찾으며"로 바뀌었다. 이게 성장이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핸드폰을 봤다. 공모전 제출 완료 메일이 왔다. "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결과는 1월 중 발표됩니다." 떨어질 수도 있다. 괜찮다. 중요한 건, 낼 게 생겼다는 것. 남자친구한테 톡을 보냈다. "냈어. 공모전." "ㅊㅊ 결과 나오면 밥 사줄게" "결과 상관없이 사줘" "ㅋㅋㅋ 그래" 집에 도착했다. 샤워하고 침대에 누웠다. 2년 전 이맘때가 생각났다. "디자이너로 취업했다!" 기쁘고 떨렸다. 6개월 후. "매일 똑같은 일만..." 지루했다. 1년 후. "내가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 불안했다. 2년 차. 지금. "반복 안에서 다르게 하는 법을 안다." 조금 자신감 생겼다. 성장이 뭔지 몰랐다. 거창한 프로젝트를 해야 성장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같은 일을 다르게 보는 것. 개선점을 찾는 것. 데이터를 쌓는 것. 그게 성장이었다. 상세페이지 240개가 쓸모없는 게 아니었다. 240번의 기회였다. 내일도 상세페이지를 만든다. 241번째다. 이번엔 또 뭘 다르게 해볼까. 그 생각을 하니까 월요일이 기대된다. 신기하다.반복이 정체가 아니라 재료였다.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