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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드백

피드백 받은 후 수정하는 데 3시간이 걸리는 이유

피드백 받은 후 수정하는 데 3시간이 걸리는 이유

오늘도 3시간 선배한테 피드백 받았다. 슬랙 메시지 3줄. "전체적인 톤이 좀 더 밝았으면 좋겠어요" "여백 조정 부탁드려요" "내일 오전까지 수정본 올려주세요" 읽었다. 다시 읽었다. 또 읽었다. 뭘 고치라는 건지 모르겠다.톤이 밝다는 게 "전체적인 톤이 좀 더 밝았으면" 이게 색을 밝게 하라는 건가. 아니면 분위기를 밝게 하라는 건가. 명도를 올리라는 건가. 채도를 높이라는 건가. 파일을 열었다. 일단 색부터 건드려봤다. 배경색 #F5F5F5에서 #FFFFFF로. 너무 하얗다. 다시 #F8F8F8로. 별 차이 없다. 텍스트 색도 #333333에서 #666666으로. 아니다, 더 어두워 보인다. 원복. 30분 지났다. 이미지 색감을 건드려봤다. 포토샵 켜서 Curves 조정. 밝아졌다. 근데 이게 맞나. 이것도 아닌 것 같다. 다시 원본으로. 1시간 지났다. 선배가 원한 게 이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톤'이 색상 톤이 아니라 '느낌'을 말하는 거였을 수도. 그럼 뭘 고쳐야 하는데.여백 조정 "여백 조정 부탁드려요" 어디 여백. 위쪽인가. 아래쪽인가. 좌우인가. 전체인가. 일단 다 늘려봤다. padding 20px에서 30px로. 어색하다. 너무 넓다. 다시 25px로. 이것도 아니다. 상단만 줄여봤다. 40px에서 30px로. 답답해 보인다. 하단도 건드려봤다. 60px에서 80px로. 너무 텅 비었다. 각 섹션 사이 간격도 조정했다. 50px, 60px, 70px. 다 어색하다. 원본이 뭐였는지 까먹었다. Ctrl+Z 10번 눌렀다. 1시간 반 지났다. 결국 원본이랑 거의 똑같은 상태로 돌아왔다. 여백을 5px 늘렸다 줄였다 한 게 전부다. 이게 맞는 건가. 질문하면 되는데 "선배님, 어느 부분 여백 말씀하신 건가요?" 이 한 마디면 된다. 30초면 답 온다. 근데 못 물어본다. 이런 것도 모르나 싶을까 봐. 이미 설명했는데 또 묻는다고 생각할까 봐. 귀찮게 한다고 생각할까 봐. 선배는 바쁘다. 자기 일도 있다. 내가 물어보면 손 멈추고 답해줘야 한다. 미안하다. 그래서 혼자 3시간 동안 이것저것 만져본다.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정답일 것 같은 걸 찾는다. 2시간 반 지났다.결국 올린 파일 저장했다. "최종_수정_1204_v3.fig" 슬랙에 올렸다. "수정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메시지 보내기 전에 7번 읽었다. 마침표 위치도 고민했다. 이모지 넣을까 말까 고민했다. 결국 안 넣었다. 전송. 3시간 지났다. 선배 답장 왔다. "수고했어요. 근데 제가 말한 건 메인 배너 여백이었어요. 전체 말고요." 메인 배너. 전체가 아니라 메인 배너. 파일 다시 열었다. 메인 배너 여백 조정. 10분 걸렸다. 다음에도 똑같다 이게 처음이 아니다. 다음에도 똑같을 것이다. 피드백 받으면 일단 멍하다. 뭘 고치라는 건지 정확히 모르겠다. 물어보면 된다는 걸 안다. 근데 못 물어본다. 혼자 이것저것 시도한다. 시간만 간다. 결국 틀렸다는 걸 안다. 다시 한다. 효율이 떨어진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못 고친다. 왜냐면 물어보는 게 더 무섭다. "이것도 모르면서 디자이너 하냐"는 소리 들을까 봐. 실제로는 아무도 그렇게 말 안 하는데, 내가 혼자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3시간이 걸린다.물어보는 게 3시간보다 빠르다는 걸, 사실 알고 있다.

'감이 좀 없네'라는 말을 화장실에서 들었을 때

'감이 좀 없네'라는 말을 화장실에서 들었을 때

'감이 좀 없네' 그 순간 복도에서 들렸다. "주니 시안... 음, 감이 좀 없네." 팀장님 목소리였다. 내 자리에서 5미터 떨어진 회의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나는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손이 멈췄다.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냥 다시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선배 목소리.심장이 쿵쿵거렸다. 얼굴이 뜨거웠다. 그 시안. 사흘 밤을 새운 거였다. 레퍼런스 50개 모았다. 무드보드 3번 갈아엎었다. 컬러 조합만 20번 바꿨다. 월요일 아침 9시에 슬랙으로 올렸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멘션 달고. 읽음 표시는 10분 만에 떴다. 답장은 없었다. 화요일도 답 없음. 수요일 점심때 팀장님이 "주니 시안 회의 때 보자" 했다. 지금이 그 회의다. 나는 초대받지 못했다. 화장실 자리를 벗어났다. 걸었다. 복도, 계단, 화장실. 제일 안쪽 칸. 문 잠갔다. 변기 뚜껑 덮고 앉았다. 울지 않으려고 했다. 눈물이 났다. "감이 없다"는 게 뭔데. 뭘 어떻게 하면 감이 있는 건데. 레퍼런스 따라 했다고? 그러면 "참신하지 않다"고 했잖아. 내 스타일로 했다고? "브랜드랑 안 맞는다"고 했고.핸드폰 켰다. 슬랙 열었다. 내가 올린 시안 파일 다시 봤다. 뭐가 문제지. 여백? 폰트? 색? 레이아웃? 모르겠다. 전부 다 문제 같았다. 휴지로 눈 닦았다. 코 풀었다. 거울 봤다. 눈 빨갛다. 립밤 발랐다. 볼 두드렸다. 물 마셨다. 3시 47분. 자리 돌아가야 한다. 퇴근 후 6시 32분에 나왔다. 선배들보다 먼저는 못 나간다. 지하철 4호선. 신림역까지 40분. 서서 갔다. 핸드폰으로 '디자인 감각 키우는 법' 검색했다. 블로그 글 5개 읽었다. 다 똑같았다. "많이 보세요. 매일 연습하세요. 피드백 받으세요." 알아. 다 하고 있어. 근데 안 되니까 문제지. 집 도착. 7시 18분. 배고팠는데 밥 생각 안 났다. 침대에 누웠다. 천장 봤다. 남자친구한테 톡 왔다. "오늘 어땠어?" "그냥 그랬어." 보냈다. "힘들어? 전화할까?" "아니 괜찮아. 피곤해서 좀 쉴게." "응 푹 쉬어. 내일 보자."전화하면 울 것 같았다. 울면 설명해야 한다. 설명하면 더 초라해진다. '회사 그만둘까.' 생각했다. 진지하게. 근데 그만두고 뭐 해. 이것밖에 못 하는데. 유튜브 9시쯤 일어났다. 샤워했다. 편의점 가서 삼각김밥 샀다. 노트북 켰다. 유튜브 열었다. '디자인 감각'으로 검색. 영상 하나 클릭. "디자이너에게 감각이란 무엇인가 | 주니어 디자이너 필수 시청" 17분짜리. 다 봤다. "감각은 타고나는 게 아닙니다. 쌓이는 겁니다." 강사가 말했다. 유명한 사람. 수강생 후기 좋은. "좋은 디자인 100개 보면, 안 좋은 디자인이 보입니다. 1000개 보면, 왜 안 좋은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또 봤다. 메모했다.매일 레퍼런스 10개 저장 왜 좋은지 3줄 써보기 직접 따라 만들어보기"따라 만들기"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레퍼런스 모으기만 했다. 1000개 넘게 저장했다. 근데 한 번도 따라 만들어본 적 없다. 그날 밤 핀터레스트 켰다. 저장한 레퍼런스 중에 제일 좋아하는 거 하나 골랐다. 해외 브랜드 상세페이지. 미니멀한데 감각적. 여백 쓰는 게 예술. 피그마 켰다. 새 파일 만들었다. "따라하기_001" 스포이드로 색 따왔다. 폰트 찾았다. 레이아웃 재구성했다. 1시간 걸렸다. 완성했다. 나란히 놓고 봤다. 다르다. 많이 다르다. 원본은 숨 쉬는 것 같다. 내 건 답답하다. 왜지. 확대해서 봤다. 여백을 쟀다. 패딩, 마진, 라인 높이. 숫자가 달랐다. 미묘하게. 원본: 타이틀 아래 56px 여백. 내 거: 40px. 원본: 라인 높이 1.8. 내 거: 1.5. 8px 차이. 0.3 차이. 이게 차이를 만들었다. "감각은 디테일이구나." 혼자 중얼거렸다. 다음 날 출근했다. 9시 5분. 평소보다 일찍. 선배가 말 걸었다. "주니야, 어제 시안 말이야. 팀장님이..." "네. 들었어요. 복도에서." "아. 그래?" 선배가 민망한 표정. "미안. 문 닫을걸." "아니에요. 괜찮아요." "다시 해야 할 것 같은데. 내가 레퍼런스 몇 개 보내줄게." "감사합니다." 자리 앉았다. 슬랙 확인했다. 선배가 보낸 레퍼런스 3개. 하나씩 열어봤다. 저장했다. 여백 쟀다. 폰트 확인했다. 색상 스포이드 떴다. 점심시간. 혼자 먹었다. 핸드폰으로 어제 만든 따라하기 파일 봤다. 오후에 새 시안 시작했다. 레퍼런스 참고했다. 근데 숫자를 똑같이 맞췄다. 여백 56px. 라인 높이 1.8. 폰트 크기 48px. 5시쯤 완성했다. 팀장님한테 보냈다. "재시안 확인 부탁드립니다." 읽음. 30분 뒤 답장. "오 이번 건 괜찮네. 이 방향으로 가자." 심장이 또 쿵쾅거렸다. 근데 어제랑 다른 쿵쾅. 선배가 엄지 이모지 달았다. 나는 파일을 저장했다. "시안_최종_승인_v1" 그 후 '감이 없다'는 말. 아직도 생각난다. 근데 이제는 안다. 감이 없는 게 아니라 디테일이 없었던 거. 레퍼런스 1000개 모아도 소용없다. 하나를 제대로 뜯어봐야 한다. 매일 밤 30분. 따라 만들기 한다. 지금 43개째. 여전히 선배 시안이 더 좋다. 팀장님 피드백 받으면 떨린다. 근데 3개월 전 내 시안 보면 부끄럽다. 그게 성장이다. 감각은 하루아침에 안 생긴다. 매일 0.1%씩 쌓인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 그걸로 됐다.화장실에서 운 날, 나는 좀 더 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