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이 좀 없네'라는 말을 화장실에서 들었을 때

'감이 좀 없네'라는 말을 화장실에서 들었을 때

‘감이 좀 없네’

그 순간

복도에서 들렸다.

“주니 시안… 음, 감이 좀 없네.”

팀장님 목소리였다. 내 자리에서 5미터 떨어진 회의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나는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손이 멈췄다.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냥 다시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선배 목소리.

심장이 쿵쿵거렸다. 얼굴이 뜨거웠다.

그 시안. 사흘 밤을 새운 거였다. 레퍼런스 50개 모았다. 무드보드 3번 갈아엎었다. 컬러 조합만 20번 바꿨다.

월요일 아침 9시에 슬랙으로 올렸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멘션 달고.

읽음 표시는 10분 만에 떴다. 답장은 없었다.

화요일도 답 없음. 수요일 점심때 팀장님이 “주니 시안 회의 때 보자” 했다.

지금이 그 회의다. 나는 초대받지 못했다.

화장실

자리를 벗어났다. 걸었다. 복도, 계단, 화장실.

제일 안쪽 칸. 문 잠갔다. 변기 뚜껑 덮고 앉았다.

울지 않으려고 했다. 눈물이 났다.

“감이 없다”는 게 뭔데. 뭘 어떻게 하면 감이 있는 건데.

레퍼런스 따라 했다고? 그러면 “참신하지 않다”고 했잖아.

내 스타일로 했다고? “브랜드랑 안 맞는다”고 했고.

핸드폰 켰다. 슬랙 열었다. 내가 올린 시안 파일 다시 봤다.

뭐가 문제지. 여백? 폰트? 색? 레이아웃?

모르겠다. 전부 다 문제 같았다.

휴지로 눈 닦았다. 코 풀었다. 거울 봤다. 눈 빨갛다.

립밤 발랐다. 볼 두드렸다. 물 마셨다.

3시 47분. 자리 돌아가야 한다.

퇴근 후

6시 32분에 나왔다. 선배들보다 먼저는 못 나간다.

지하철 4호선. 신림역까지 40분. 서서 갔다.

핸드폰으로 ‘디자인 감각 키우는 법’ 검색했다. 블로그 글 5개 읽었다. 다 똑같았다.

“많이 보세요. 매일 연습하세요. 피드백 받으세요.”

알아. 다 하고 있어. 근데 안 되니까 문제지.

집 도착. 7시 18분. 배고팠는데 밥 생각 안 났다.

침대에 누웠다. 천장 봤다.

남자친구한테 톡 왔다. “오늘 어땠어?”

“그냥 그랬어.” 보냈다.

“힘들어? 전화할까?”

“아니 괜찮아. 피곤해서 좀 쉴게.”

“응 푹 쉬어. 내일 보자.”

전화하면 울 것 같았다. 울면 설명해야 한다. 설명하면 더 초라해진다.

‘회사 그만둘까.’

생각했다. 진지하게.

근데 그만두고 뭐 해. 이것밖에 못 하는데.

유튜브

9시쯤 일어났다. 샤워했다. 편의점 가서 삼각김밥 샀다.

노트북 켰다. 유튜브 열었다.

‘디자인 감각’으로 검색. 영상 하나 클릭.

“디자이너에게 감각이란 무엇인가 | 주니어 디자이너 필수 시청”

17분짜리. 다 봤다.

“감각은 타고나는 게 아닙니다. 쌓이는 겁니다.”

강사가 말했다. 유명한 사람. 수강생 후기 좋은.

“좋은 디자인 100개 보면, 안 좋은 디자인이 보입니다. 1000개 보면, 왜 안 좋은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또 봤다. 메모했다.

  • 매일 레퍼런스 10개 저장
  • 왜 좋은지 3줄 써보기
  • 직접 따라 만들어보기

“따라 만들기”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레퍼런스 모으기만 했다. 1000개 넘게 저장했다. 근데 한 번도 따라 만들어본 적 없다.

그날 밤

핀터레스트 켰다. 저장한 레퍼런스 중에 제일 좋아하는 거 하나 골랐다.

해외 브랜드 상세페이지. 미니멀한데 감각적. 여백 쓰는 게 예술.

피그마 켰다. 새 파일 만들었다. “따라하기_001”

스포이드로 색 따왔다. 폰트 찾았다. 레이아웃 재구성했다.

1시간 걸렸다. 완성했다. 나란히 놓고 봤다.

다르다. 많이 다르다.

원본은 숨 쉬는 것 같다. 내 건 답답하다.

왜지.

확대해서 봤다. 여백을 쟀다. 패딩, 마진, 라인 높이.

숫자가 달랐다. 미묘하게.

원본: 타이틀 아래 56px 여백. 내 거: 40px.

원본: 라인 높이 1.8. 내 거: 1.5.

8px 차이. 0.3 차이.

이게 차이를 만들었다.

“감각은 디테일이구나.”

혼자 중얼거렸다.

다음 날

출근했다. 9시 5분. 평소보다 일찍.

선배가 말 걸었다. “주니야, 어제 시안 말이야. 팀장님이…”

“네. 들었어요. 복도에서.”

“아. 그래?” 선배가 민망한 표정. “미안. 문 닫을걸.”

“아니에요. 괜찮아요.”

“다시 해야 할 것 같은데. 내가 레퍼런스 몇 개 보내줄게.”

“감사합니다.”

자리 앉았다. 슬랙 확인했다. 선배가 보낸 레퍼런스 3개.

하나씩 열어봤다. 저장했다. 여백 쟀다. 폰트 확인했다. 색상 스포이드 떴다.

점심시간. 혼자 먹었다. 핸드폰으로 어제 만든 따라하기 파일 봤다.

오후에 새 시안 시작했다. 레퍼런스 참고했다. 근데 숫자를 똑같이 맞췄다.

여백 56px. 라인 높이 1.8. 폰트 크기 48px.

5시쯤 완성했다. 팀장님한테 보냈다. “재시안 확인 부탁드립니다.”

읽음. 30분 뒤 답장.

“오 이번 건 괜찮네. 이 방향으로 가자.”

심장이 또 쿵쾅거렸다. 근데 어제랑 다른 쿵쾅.

선배가 엄지 이모지 달았다.

나는 파일을 저장했다. “시안_최종_승인_v1”

그 후

‘감이 없다’는 말. 아직도 생각난다.

근데 이제는 안다. 감이 없는 게 아니라 디테일이 없었던 거.

레퍼런스 1000개 모아도 소용없다. 하나를 제대로 뜯어봐야 한다.

매일 밤 30분. 따라 만들기 한다. 지금 43개째.

여전히 선배 시안이 더 좋다. 팀장님 피드백 받으면 떨린다.

근데 3개월 전 내 시안 보면 부끄럽다. 그게 성장이다.

감각은 하루아침에 안 생긴다. 매일 0.1%씩 쌓인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

그걸로 됐다.


화장실에서 운 날, 나는 좀 더 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