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100개 만들다 보니 생긴 일

배너 100개 만들다 보니 생긴 일

오늘도 배너다

9시 30분. 출근하고 컴퓨터 켰다. 어제 만든 배너 피드백이 메일함에 있다. “로고 좀 더 크게, 텍스트 굵기 조정” 열었다. 수정했다. 저장했다.

이게 벌써 97번째 배너다. 세어봤다. 진짜로. 엑셀에 적어뒀다. 날짜별로.

처음엔 한 개에 2시간 걸렸다. 지금은 30분. 빨라진 건지, 대충 하는 건지 모르겠다.

패턴이 보인다

배너는 다 똑같다. 정확히는, 구조가 똑같다.

상단: 로고 중간: 카피 하단: 버튼

색만 바뀐다. 문구만 바뀐다. 제품 이미지만 바뀐다.

선배가 말했다. “익숙해지면 빨라져.” 맞다. 빨라졌다.

근데 이게 성장인가. 그냥 복사 붙여넣기 고수가 된 건가.

포토샵 단축키는 외웠다. Ctrl+J, Ctrl+T, Ctrl+G 손가락이 기억한다. 머리는 딴 생각 중이다.

48번째에 깨달은 것

“이미지 여백 좀 더 줘.” 피드백을 받았다.

여백. 처음엔 몰랐다. 뭘 더 주라는 건지. 공간이 비어 보이면 불안했다. 뭐라도 채워 넣고 싶었다.

근데 48번째 배너쯤. 여백을 주니까 로고가 살았다. 텍스트가 읽혔다. 버튼이 눌러지고 싶어 보였다.

“아, 이거구나.” 혼자 중얼거렸다.

선배가 지나가다 봤다. “오, 이번 건 괜찮은데?” 그날 기분이 좋았다. 퇴근길에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샀다.

반복은 거짓말을 안 한다

73번째 배너. 색 조합이 이상했다. 빨강에 주황을 섞었다. 눈이 아팠다.

“주니아, 이거 색 좀…” 선배가 말을 흐렸다.

수정했다. 빨강을 톤 다운시켰다. 주황 대신 베이지를 넣었다. 훨씬 나았다.

“색감이 늘었네.” 선배 말에 어깨가 올라갔다.

82번째. 텍스트 정렬이 삐뚤었다. 가이드 라인 없이도 보였다. 예전엔 몰랐다. 이젠 보인다.

100개를 만들면

오늘 아침. 100번째 배너를 열었다.

30분 걸렸다. 피드백 없이 통과됐다. “바로 올려도 되겠네.”

기분이 이상했다. 기쁜데 허전했다.

100개를 만들면 뭐가 생길까. 실력? 포트폴리오? 아니면 그냥 숫자?

파일 폴더를 열었다. 배너_v1, 배너_v2, 배너_final 배너_final_final, 배너_진짜최종

웃겼다. 파일명이 내 성장 과정이다.

처음 배너는 레이어가 50개였다. 지금은 15개다. 정리하는 법을 배웠다.

처음엔 폰트를 10개 써봤다. 지금은 3개로 끝낸다. 고르는 법을 배웠다.

처음엔 색을 주르륵 깔았다. 지금은 메인 하나, 포인트 하나. 빼는 법을 배웠다.

반복이 가르쳐줬다. 선배 말보다, 강의보다. 100번 하니까 보였다.

그래도 불안하다

점심시간. 동기한테 톡을 보냈다.

“나 요즘 배너만 만들어.” “배우는 거 맞나?”

답장이 왔다. “나도 똑같음 ㅋㅋ” “근데 포폴엔 못 넣겠더라.”

맞다. 배너 100개 만들었다고 포트폴리오에 쓸 순 없다. “반복 작업 고수”는 자랑이 아니다.

그래도. 레이어 정리는 빨라졌다. 색 조합 실패는 줄었다. 선배 눈치는… 여전하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디자인 계정들 봤다. 다들 멋있는 작업물을 올린다. 브랜딩, 패키지, 아이덴티티.

나는? 배너_final_final_0516.psd

웃겼다. 근데 속상하진 않았다.

101번째는 다를까

내일 또 배너를 만들 것이다. 아마 30분 걸릴 것이다. 아마 한 번에 통과될 것이다.

그럼 뭐가 달라지나. 31분짜리 배너? 더 빠른 복붙?

모르겠다.

근데 48번째에 여백을 배웠다. 73번째에 색을 배웠다. 82번째에 정렬을 배웠다.

101번째엔 뭘 배울까. 200번째엔?

파일을 닫았다. 내일 또 연다.

반복은 지루하다. 근데 거짓말은 안 한다.

손은 빨라졌다. 눈은 정확해졌다. 자신감은… 조금 생겼다.

배너 100개. 포폴엔 못 넣어도. 내 안엔 쌓였다.


100개를 만들어야 101번째가 다르다는 걸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