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선택을 '이게 왠지 더 나을 것 같은데' 로 하면 안 되는 이유
- 28 Dec, 2025
디자인 선택을 ‘이게 왠지 더 나을 것 같은데’로 하면 안 되는 이유
오늘도 ‘왠지’ 로 일했다
오전 10시. 팀장님이 배너 시안 3개 요청했다. A안, B안, C안 만들었다. 근데 뭐가 좋은지 모르겠다. 색 배치만 다른 건데 내가 봐도 비슷하다.
팀장님이 물으신다. “주니 생각엔 어떤 게 나을 것 같아?” “음… B안이요. 왠지 더 나아 보여서요.” “왠지? 왜 나아 보이는데?”
대답 못 했다. 그냥 느낌이라고 말할 순 없잖아. “글자가 더 잘 보여서요…” 얼버무렸다. 팀장님은 고개만 끄덕이고 가셨다. 표정이 이상했다.

점심시간에 혼자 먹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왜 B안이 좋다고 했을까. 진짜 이유가 뭐였지. 그냥 가운데 있어서? 무난해 보여서?
감각은 재능이 아니라 경험이다
선배가 커피 타러 가길래 따라갔다. “선배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디자인 선택할 때 어떻게 결정하세요?”
선배가 웃었다. “주니는 감으로 하지?” 들켰다. “네…” “나도 신입 때 그랬어. 근데 그게 문제야.”
선배 말이다. 감각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고. 수천 번 봐서 쌓인 거라고.
“A안이 나은 이유가 ‘그냥’이면 안 돼. 위계구조가 명확해서, 여백이 적절해서, 타이포가 본문과 균형 맞아서. 이런 이유가 있어야 해.”
나는 그런 거 생각 안 하고 만들었다. 예쁘면 됐지 뭐. 그게 디자인 아닌가 싶었다.

물어보면 무능해 보일까 봐
사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다. 왜 이 여백이 20px여야 하는지. 왜 이 색이 #FF5733이어야 하는지. 왜 제목을 왼쪽 정렬하면 안 되는지.
근데 못 물어본다. 2년차인데 이것도 모르냐고 할까 봐. ‘감이 없네’ 또 들을까 봐.
지난주 회의 때다. 마케팅팀에서 물었다. “이 버튼 색은 왜 파란색이에요?” 나: “음… 브랜드 컬러라서요.” “그럼 여기는 왜 회색이에요?” “음… 눈에 덜 띄게 하려고요.” “기준이 뭐예요?”
대답 못 했다. 그냥 했다. 선배가 대신 설명해줬다.
“주요 액션은 브랜드 컬러, 부가 액션은 중성 톤. 위계에 따라 색상 강도를 조절했습니다.”
아, 그런 거였구나. 나는 그냥 ‘이게 이쁘니까’ 했는데.

질문하면 무능해 보인다는 생각. 틀렸다. 근거 없이 일하는 게 무능한 거다.
클라이언트는 ‘왠지’를 안 산다
저번 달 외주 작업. 카페 브랜딩이었다. 로고 시안 5개 만들었다. 사장님이 물으셨다. “이 로고는 왜 이렇게 만드셨어요?”
“감성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손글씨체 썼구요, 컬러는 따뜻한 느낌 주려고 브라운 톤으로…”
“그런데 왜 손글씨체가 감성적인가요?” “음… 사람 손으로 쓴 거라서요?” “우리 카페가 감성적이어야 하는 이유는요?”
말문이 막혔다. 집에 와서 혼자 생각했다.
사장님 고객층: 30대 직장인. 위치: 오피스 밀집 지역. 니즈: 빠른 포장, 일 하면서 마시기 좋은 커피.
감성 카페? 아니잖아. 나는 내 취향으로 만들었다. 근거 없이.
결국 수정 3번 했다. 마지막엔 선배가 같이 들어갔다. 사장님이 선배 설명 듣고 바로 결정하셨다.
“이 폰트는 가독성이 높고 전문적으로 보입니다. 컬러는 차분하면서도 프리미엄 느낌을 줍니다. 타겟층인 직장인들이 신뢰할 수 있는 디자인입니다.”
같은 디자인이었다. 설명만 달랐다.
질문하지 않으면 2년차가 10년 돼도 신입이다
어제 점심시간. 같은 부트캠프 출신 친구를 만났다. 얘도 2년차. 근데 일하는 게 달랐다.
“나 요즘 선배한테 하루에 10개는 물어봐.” “진짜? 뭘?” “다. 왜 이 간격이 8px인지, 왜 이 색 썼는지, 왜 이 레이아웃 선택했는지.”
“귀찮아하지 않아?” “처음엔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선배가 그러는데, 근거 있게 물어보면 오히려 좋대. ‘얘 생각하면서 일하네’ 이렇게 보인대.”
나는 반대로 했다. 혼자 고민하고, 감으로 결정하고, 피드백 받으면 수정만 하고.
친구가 말했다. “주니야, 우리 경력 2년이야. 2년 동안 감으로만 일하면 10년 돼도 신입이야. 근데 2년 동안 이유를 배우면 5년차처럼 일해.”
그 말 듣고 울컥했다. 맞는 말이었다.
이번 주부터 바꾼 것
월요일. 출근해서 노션에 페이지 만들었다. 제목: “내가 한 디자인 선택과 이유”
매일 기록한다.
- 오늘 어떤 선택을 했는지
- 왜 그렇게 했는지
- 근거가 있었는지
- 없었다면 뭐가 필요했는지
화요일. 상세페이지 작업 중 막혔다. 제품 이미지를 왼쪽에 둘까 오른쪽에 둘까.
전엔 그냥 ‘왼쪽이 나을 것 같은데’ 하고 했다. 이번엔 선배한테 물었다.
“선배님, 제품 이미지 배치 여쭤봐도 될까요? 왼쪽과 오른쪽 중 어떤 게 나을까요?”
선배가 물었다. “주니는 어떻게 생각해?” “Z패턴으로 보면 왼쪽이 먼저 보일 것 같은데, 그럼 텍스트가 나중에 읽혀서 구매 유도가 약할까 싶어서요.”
선배가 웃었다. “오, 생각하고 물어보네?” “네… 맞는지 모르겠어서요.” “맞아. 이커머스는 보통 제품 이미지 오른쪽에 둬. 왼쪽에 핵심 정보와 버튼 먼저 보여주는 거지. 근데 제품이 비주얼로 승부하는 거면 왼쪽도 괜찮아.”
10초 대화로 2시간 고민 끝났다. 근데 중요한 건 다른 거다.
선배가 나를 다르게 봤다. ‘생각하는 디자이너’로.
수요일. 팀 회의. 앱 리뉴얼 디자인 발표. 내 차례가 왔다.
“이번 홈 화면은 카드 레이아웃으로 구성했습니다. 리스트보다 카드가 나을 것 같아서…”
말하다가 멈췄다. ‘나을 것 같아서’를 또 썼다.
다시 시작했다. “리스트보다 카드를 선택한 이유는, 타겟 유저가 20대 후반이고, 인스타그램, 핀터레스트 같은 카드형 UI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콘텐츠가 이미지 중심이라 카드 형태가 정보 전달에 효과적입니다.”
팀장님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좋아요. 계속해보세요.”
발표 끝나고 선배가 귓속말했다. “많이 늘었네. 요즘 뭐해?”
매일 이유를 찾았다고 했다. 선배가 웃었다. “그래, 그게 디자인이야.”
감각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지금 깨달았다. ‘디자인 감각’은 타고나는 게 아니다. 수천 번 ‘왜’를 묻고 답하면서 만들어지는 거다.
선배는 감으로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근데 그게 아니다. 너무 많이 물어보고 생각해서 이제 자동으로 나오는 거다.
나는 2년 동안 ‘왜’를 건너뛰었다. 그래서 아직도 신입처럼 일한다.
어제 저녁. 개인 작업 중 색 선택을 못 하고 있었다. 민트색이냐 네이비냐.
전엔 ‘민트가 예쁘니까’ 했을 거다. 이번엔 물었다. 나한테.
“이 페이지의 목적이 뭐지?” 포트폴리오 소개. 전문성 전달.
“민트는 어떤 느낌을 주지?” 젊고, 친근하고, 부드럽다.
“네이비는?” 차분하고, 믿음직하고, 전문적이다.
네이비를 선택했다. 이유가 있어서.
질문하는 게 무능이 아니라 성장이다
오늘 아침. 출근해서 선배한테 말했다.
“선배님, 앞으로 제가 자주 물어봐도 될까요?” “응, 당연하지.” “근거 없이 일하는 게 싫어서요. 매번 왜 이렇게 했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선배가 진지하게 봤다. “주니야, 그게 프로야. 클라이언트가 ‘왜’를 물어봤을 때 ‘왠지요’라고 답하는 디자이너는 프로가 아니야.”
맞다.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은 모든 픽셀에 이유가 있어야 한다.
예쁘다고 끝이 아니다. 왜 예쁜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2년 차가 배워야 하는 건 툴이 아니라 언어다
피그마 잘 쓰는 거 중요하다. 포토샵 능숙한 거 중요하다. 트렌드 따라가는 것도 중요하다.
근데 더 중요한 게 있다. 내 선택을 설명하는 언어.
“이게 예쁘니까요” → “위계구조가 명확해서 정보 전달이 효과적입니다” “왠지 이게 나아요” → “타겟 유저의 사용 패턴에 부합합니다” “그냥 이렇게 했어요” →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일관성을 유지했습니다”
같은 디자인이다. 설명만 다르다. 근데 설명이 디자인을 완성한다.
이번 주 목표. 질문 10개 하기. 모든 선택에 이유 달기. ‘왠지’ 안 쓰기.
“감각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거다. 매일 ‘왜’를 물어보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