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 때 고개만 끄덕끄덕하는 내가 전달한 것은 무엇인가

회의 때 고개만 끄덕끄덕하는 내가 전달한 것은 무엇인가

회의 때 고개만 끄덕끄덕하는 내가 전달한 것은 무엇인가 오늘도 끄덕였다 회의실 들어갔다. 자리는 맨 끝. 노트북 열고 펜 꺼냈다. 필기할 준비. "이번 프로젝트 컨셉 브레인스토밍 시작하겠습니다." 팀장님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니어님 생각은 어때요?" 심장이 쿵했다. "아... 네... 좋은 것 같습니다." 또 끄덕였다. 회의 끝나고 나왔다. 50분 동안 내가 한 말은 딱 세 문장. "좋은 것 같습니다", "네 맞습니다", "확인하겠습니다". 그리고 고개는 37번쯤 끄덕인 것 같다. 세진 않았지만 목이 아프다.끄덕임의 정확한 의미 집에 와서 생각했다. 내 끄덕임이 전달한 건 뭘까. '당신 말이 맞아요'였을까. 아니다. 나는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이해했어요'였을까. 그것도 아니다. 이해 못 한 부분이 태반이다. '열심히 듣고 있어요'? 이건 맞다. 근데 듣기만 하는 게 참여일까. 정확히 말하면 내 끄덕임은 이거다. '저 여기 있습니다. 방해는 안 할게요.' 회의에서 투명인간 되는 법. 고개만 끄덕이면 된다. 민수 선배가 지난주에 말했다. "주니어, 회의 때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봐." 나는 그때도 고개를 끄덕였다.침묵하는 순간들 브레인스토밍 회의는 매주 금요일 3시. 일주일 중 가장 긴장되는 시간이다. 첫 번째 침묵. "이번 메인 비주얼 어떻게 갈까요?" 머릿속에 이미지가 있다. 어제 핀터레스트에서 본 레퍼런스. 저거랑 비슷하게 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입이 안 열린다. '혹시 이거 유치한 아이디어 아닐까?' '선배들이 이미 생각한 건 아닐까?' '말했다가 이상하면 어떡하지?' 결국 아무 말도 안 했다. 성우 선배가 내가 생각한 거랑 비슷한 걸 말했다. 다들 좋다고 했다. 나는 또 끄덕였다. 두 번째 침묵. "타이포 스타일은?" 나는 산세리프가 더 맞을 것 같았다. 클라이언트 브랜드 가이드 보니까 거기도 고딕 계열 썼다. 그런데 팀장님이 명조 이야기를 꺼냈다. '아 내가 잘못 본 건가?' '가이드 다시 확인해볼까?' '지금 말하면 회의 흐름 끊는 거 아닐까?' 입 다물었다. 회의 끝나고 팀장님한테 따로 말씀드렸다. "저기... 산세리프는 어떨까요?" "아 그것도 괜찮네. 회의 때 얘기하지 그랬어." 회의 때 말할 걸. 그 순간은 지나갔다. 세 번째 침묵. "이거 너무 평범한 거 아니야?" 선배가 만든 시안 보면서 다들 얘기한다. 나도 그렇게 느꼈다. 어제 작업 파일 봤을 때부터. 그런데 그 선배는 나한테 항상 잘해준다. 점심도 사주고 퇴근길에 태워주기도 한다. '내가 뭔데 선배 시안을 평가해?' '나도 제대로 못 만들면서?' 끄덕이고 있었다.끄덕임이 만든 것들 회의 후 일주일. 컨셉 확정됐다. 명조 타이포로 갔다. 클라이언트 피드백 왔다. "브랜드랑 안 맞는 것 같은데요. 산세리프로 바꿔주세요." 팀장님이 한숨 쉬었다. "처음부터 다시네." 그때 민수 선배가 나를 봤다. 나도 선배를 봤다. 아무 말 안 했지만 둘 다 알았다. 내가 회의 때 말했으면 이런 일 없었을 거라는 걸. 야근 시작됐다. 3일 동안 타이포 다시 잡았다. 내 침묵이 만든 야근이다. 그리고 또 다른 것도 만들었다. '의견 없는 디자이너'라는 이미지. 지난주 인사팀에서 1:1 면담했다. "업무에 어려움은 없나요?" "없습니다." 고개 끄덕. "성장하고 있다고 느껴요?" "네." 고개 끄덕. 거짓말이다. 어렵고 안 자라는 것 같다. 그런데 말을 못 했다. 면담 끝나고 기록 공유받았다. '업무 만족도 높음. 특이사항 없음.' 내 끄덕임이 만든 기록이다. 실제 내 상태랑은 전혀 다른. 말하지 않으면 없는 것 성우 선배랑 술 마셨다. 취해서 물어봤다. "선배는 회의 때 어떻게 그렇게 말 잘해요?" "잘하는 거 아니야. 그냥 해." "틀리면요?" "틀리면 배우지." 간단했다. 나는 너무 복잡하게 생각했다. 선배가 또 말했다. "너 머릿속에 생각 많더라. 파일 보면 알아." "네?" "레이어 정리 되게 잘해. 디테일도 챙기고. 근데 왜 회의 때는 그걸 안 꺼내?" 몰랐다. 선배가 내 작업을 그렇게 봤다는 것도. 내가 생각이 있다는 걸 알았다는 것도. "말 안 하면 없는 거야. 디자이너는 작업만 하는 게 아니라 설명도 해야 돼." 집에 오는 길에 생각했다. 내 포트폴리오에 적힌 말들. '사용자 중심 디자인' '문제 해결 능력' '커뮤니케이션 스킬' 다 거짓말이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사용자 중심으로 생각해도 말을 안 하면 모른다. 문제를 알아도 말을 안 하면 해결 안 된다. 커뮤니케이션은 혼자 고개 끄덕이는 게 아니다. 끄덕임을 멈춘 날 이번 주 금요일 회의. 각오했다. 오늘은 꼭 말한다. "랜딩페이지 레이아웃 의견 있어요?" 손을 들었다. 떨렸다. "저... 모바일 퍼스트로 가면 어떨까요? 트래픽 데이터 보니까 모바일이 73%거든요." 다들 나를 봤다. 3초가 3시간 같았다. 팀장님이 말했다. "오 좋은데? 그럼 모바일 기준으로 잡아볼까요?" 끝이었다. 세상이 무너지지 않았다. 회의 끝나고 민수 선배가 어깨 쳤다. "오늘 좋았어. 데이터 근거 들어서 말하니까 설득력 있더라." 화장실 갔다. 거울 봤다. 여전히 똑같은 얼굴인데. 뭔가 달라 보였다. 목소리 낸 사람의 얼굴. 집에 와서 일기 썼다. '오늘 회의에서 의견 말했다. 떨렸다. 그런데 괜찮았다.' 짧은 문장이지만. 2년 동안 한 번도 쓰지 못한 문장이다. 여전히 어렵지만 다음 주 회의. 또 말했다. 이번엔 덜 떨렸다. "컬러 팔레트 좀 더 밝게 가면 어떨까요? 타겟이 2030인데 지금 톤이 너무 무거운 것 같아서요." 누가 물었다. "어떤 톤으로?" 준비 안 했던 질문이다. 당황했다. "저... 레퍼런스 찾아서 다음 회의 때 보여드려도 될까요?" 팀장님이 웃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완벽하지 않아도 됐다. 말을 시작하는 게 중요했다. 여전히 회의는 어렵다. 말하기 전에 심장 뛴다. 틀릴까 봐 무섭다. 그런데 알았다. 고개만 끄덕이는 게 더 무섭다는 걸. 침묵이 더 큰 실수라는 걸. 내 끄덕임이 전달했던 건 결국. '나는 여기 없습니다'였다. 이제는 다른 걸 전달하고 싶다. '나는 여기 있습니다. 서툴지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완벽한 의견이 아니어도 된다. 데이터가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시작하는 것. 입을 여는 것. 그게 주니어 디자이너가 회의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어제 성우 선배가 말했다. "요즘 주니어 많이 컸네. 회의 때 네 의견 듣는 게 좋아." 그 말 듣고 기분 좋아서. 저녁 내내 웃었다. 고개만 끄덕이던 내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회의실에서 고개 끄덕이는 대신, 오늘은 손을 들어본다. 떨려도.

이 길이 맞나 싶은데 다른 걸 할 줄이 없다

이 길이 맞나 싶은데 다른 걸 할 줄이 없다

오늘도 이력서 열어봤다새벽 2시에 사람인 켜놓고 있었다. '경력직 디자이너 모집'이라는 공고들. 자격요건 보다가 껐다. 3년 이상. 포트폴리오 필수. 나는 2년. 포트폴리오는 있는데 보여주기 창피한. 이런 밤이 한 달에 두세 번씩 온다. 선배한테 '이건 좀...'이라는 말 들었을 때. 팀장님이 한숨 쉬실 때. 디자인 파일 열어서 한 시간 째 커서만 깜빡일 때.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나 이거 아닌가 보다.'부트캠프 동기 단톡방에 올라온 글. "취업 준비하면서 UX 라이터 쪽도 보고 있어요." 좋아요 5개. 댓글은 없다. 나도 생각해본 적 있다. 전직. 마케터도 봤고. 기획자도 봤고. 유튜버 채용 공고도 클릭해봤다. '디자인 할 줄 아는 사람 우대'라고 써있어서. 근데 지원서는 안 썼다. 2년이 아까워서. 투자한 시간들 디자인 배운다고 부트캠프 다녔다. 6개월. 600만원. 부모님이 내주셨다. "주니야, 네가 하고 싶은 거 해." 그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취준 기간 8개월. 포트폴리오 10번 갈아엎었다. 면접 15곳. 떨어진 곳 14곳. 붙은 곳이 지금 회사다. 입사하고 2년. 선배들한테 까이면서 배운 것들. 그리드 시스템. 컴포넌트 정리법. 피드백 받는 법. 아직도 부족하지만 0에서는 왔다. 이걸 다 버리고 다른 걸 시작한다? 또 신입부터? 또 면접? 또 600만원? 계산기 두드려봤다. 2년 월급 모은 거. 1500만원. 부트캠프비 600만원. 취준 기간 생활비 300만원. 총 2400만원. 이게 매몰비용인지 투자인지 모르겠다. 다른 선택지는 뭔데가끔 친구들 만난다. 대학 동기들. 다들 다른 일 한다. 은행 다니는 애는 말했다. "주니야, 디자이너 되게 좋아 보이는데? 크리에이티브하고." 웃으면서 "응, 좋아"라고 했다. 마케팅하는 애는 물었다. "연봉은 좀 오르니?" "조금씩은." 거짓말이다. 작년에 3.5프로 올랐다. 프리랜서 하는 애가 제일 솔직했다. "나도 매일 때려치울까 생각해. 근데 다른 거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그 말이 제일 찔렸다. 나도 그렇다. 디자인 빼면 뭐가 있나. 포토샵? 피그마? 어도비 일러스트? 이거 들고 뭘 하지. 영어도 토익 700점대. 코딩은 HTML 조금. 글쓰기도 블로그 일기 수준. 결국 디자인밖에 없다. 그게 제일 무섭다. 선배의 한마디 지난주 회식 자리. 선배가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니야, 나도 3년 차까지 매일 때려치울까 생각했어." "네?" "근데 5년 차 되니까 좀 보이더라. 뭘 모르는지가." 그 말이 위로가 됐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3년 더 버텨야 한다'는 협박인지. 그래도 물어봤다. "그럼 선배님은 지금 괜찮으세요?" "괜찮진 않아. 근데 이게 내 일이긴 해." 집 가는 길에 그 말 곱씹었다. '이게 내 일이긴 해.'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언제쯤. 포트폴리오 다시 열어봤다 주말에 1년 전 포트폴리오 파일 찾았다. 취준할 때 만든 거. 지금 보니까 민망하다. 레이아웃도 들쑥날쑥. 폰트도 왜 저렇게 썼지. 그래도 이걸로 붙었다. 지금 다시 만든다면? 확실히 낫게 만들 것 같다. 2년 동안 배운 게 있긴 하다. 어제 작업한 배너 다시 봤다. 선배한테 5번 피드백 받고 통과된 거. 1년 전 나는 이거 못 만들었을 거다. 성장은 하고 있는 건가. 느리지만. 사람인 북마크 폴더 열어봤다. '이직 고려' 폴더. 공고 23개. 하나도 안 지워졌다. 클릭했다가 껐다. 또 내일 보자. 그래도 아침은 온다 출근길 지하철. 가방에서 태블릿 꺼냈다. 핀터레스트 켜서 레퍼런스 저장한다. 좋은 디자인 보면 그래도 기분이 좋다. '나도 이렇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 이게 아직 있다는 게 다행인가. 회사 도착. 9시 3분. 자리 앉아서 피그마 켰다. 어제 못 끝낸 작업 이어서 한다. 팀장님이 지나가면서 말했다. "주니야, 어제 배너 괜찮던데.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이럴 때는 생각한다. '오늘은 버틸 만하네.' 그렇게 하루가 또 간다. 때려치울까 고민하면서도. 내일도 출근할 거면서.이 길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근데 지금 당장 다른 길도 없다. 그래서 오늘도 피그마를 켠다.

선배 파일을 허락 없이 열어본 내 불안감

선배 파일을 허락 없이 열어본 내 불안감

선배 파일을 허락 없이 열어본 내 불안감 그 파일을 열었다 금요일 오후 5시. 선배가 조퇴했다. "주니 씨, 먼저 갈게요. 수고하세요." "네, 편히 들어가세요." 30분 후, 나는 선배 컴퓨터 앞에 섰다. 아니, 정확히는 공용 서버 폴더였다. 선배 컴퓨터가 아니라 회사 서버. 누구나 볼 수 있는 곳. 그래도 심장이 뛰었다. 폴더명: 'OOO 메인배너_최종_0215' 클릭했다. 포토샵 파일이 열렸다. 레이어가 142개였다. 내 파일은 보통 30개 정도인데. "와..." 첫 반응은 감탄이었다. 두 번째 반응은 죄책감이었다.배우려고 한 건데 선배는 항상 파일 정리가 깔끔했다. 피드백 회의 때마다 느꼈다. "여기 이 요소는 이렇게 수정하면 돼요." 클릭 한 번에 레이어가 찾아진다. 나는 레이어를 찾다가 회의 시간을 잡아먹는다. "주니 씨, 레이어 정리 좀 해요. 나중에 본인도 못 찾아요." "네... 죄송합니다." 그래서 보고 싶었다. 선배가 어떻게 정리하는지. 그룹을 어떻게 나누는지. 이름을 어떻게 붙이는지. 학습이다. 학습. 나쁜 의도가 아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레이어를 하나씩 열어봤다. '상단_헤더_그룹' '중단_메인카피_수정본2' '하단_CTA버튼_최종' 규칙이 있었다. 위치-역할-버전. 내 레이어명은 '레이어1', '사각형2', '텍스트 복사본3' 이런 식이었다. 공책에 적었다. 선배 레이어명 규칙. 들킬까 봐 무서웠다 15분쯤 지났을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멈췄다. 급하게 파일을 닫았다. 저장하시겠습니까? 아니오. 마우스 커서가 떨렸다. 내 자리로 뛰어갔다. 의자에 앉자마자 모니터를 응시했다. 피그마를 열어뒀다. 일하는 척. 발소리는 화장실로 향했다. 다른 팀 사람이었다. "휴..." 식은땀이 났다. 등이 축축했다. 뭐가 무서운 거지? 공용 서버잖아. 누구나 볼 수 있잖아. 그런데 왜 도둑처럼 행동했지?다음 날 선배를 못 봤다 월요일 아침. 출근했다. 선배가 "주니 씨, 주말 잘 보냈어요?" 물었다. "네, 잘 보냈어요." 평소와 같았다. 그런데 내가 이상했다. 선배 얼굴을 제대로 못 봤다. 눈을 마주치면 들킬 것 같았다. 뭘 들키는데? 아무것도 안 했는데? "주니 씨, 이번 작업은 레이어 정리 잘 해봐요."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크게 했다. 목소리에 떨림이 있었다. 그날 작업하면서 선배 레이어 규칙을 써봤다. '상단_로고_그룹', '중단_타이틀_ver1'. 신기하게 찾기가 쉬웠다. 수정할 때도 빨랐다. "오, 주니 씨 레이어 정리 많이 좋아졌네요." 선배가 칭찬했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당신 파일 봤다고 말해야 하나? "감사합니다. 더 잘하겠습니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했다. 다른 파일도 열어봤다 그 후로 습관이 됐다. 선배 조퇴하는 날, 외근 가는 날, 연차 쓰는 날. 서버 폴더를 열었다. 처음엔 레이어 구조만 봤다. 나중엔 색상 팔레트를 봤다. 어떤 폰트를 쓰는지, 자간을 얼마나 주는지, 여백을 어떻게 조절하는지. 공책이 채워졌다. '선배 작업 노트'. 집에 숨겨뒀다. 실력은 늘었다. 피드백 받는 횟수가 줄었다. 팀장님이 "주니 씨, 요즘 성장 빠르네요" 했다. 기뻤다. 동시에 찝찝했다. 이건 내 실력인가? 선배를 훔쳐본 결과인가?선배한테 들켰다 지난주 목요일이었다. "주니 씨, 잠깐 얘기할까요?" 선배가 회의실로 불렀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네, 네..." 회의실 문을 닫았다. 둘만 남았다. "혹시... 제 작업 파일 본 적 있어요?" 끝났다. 들켰다. "저, 저는..." 변명이 안 나왔다. 손이 떨렸다. "아니, 화내려는 거 아니에요." 선배가 웃었다. "요즘 주니 씨 레이어 구조가 제 스타일이랑 똑같더라고요. 색상 조합도 비슷하고. 그래서 혹시 했는데." "죄송합니다. 배우고 싶어서... 그냥..." "아니, 좋은 거예요. 저도 신입 때 그랬거든요." "네?" "선배 파일 몰래 열어보고, 폰트 조합 따라하고. 그렇게 배웠어요. 다들 그래요." 선배가 말을 이었다. "근데 다음부턴 물어봐요. 같이 보면서 설명해줄게요. 그게 더 빨라요." 눈물이 날 뻔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주니 씨, 요즘 진짜 잘하고 있어요. 스스로 찾아서 배우는 거, 쉽지 않은데." 죄책감의 정체 그날 저녁, 집에 와서 생각했다. 왜 그렇게 불안했을까. 왜 도둑질하는 기분이었을까. 결론은 이거였다. 나는 내가 부족하다고 느꼈던 거다. 당당하게 물어볼 만큼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고. 선배 시간을 뺏을 자격이 없다고. 그래서 몰래 봤던 거다. 근데 선배는 당연하다고 했다. 신입은 원래 그렇게 배운다고. 내가 나를 너무 몰아세웠다. 배우고 싶어서 찾아본 건데. 성장하고 싶어서 노력한 건데. 그걸 죄책감으로 느낄 필요가 있었나. 지금은 선배한테 물어본다. "이 부분 어떻게 하신 거예요?" "파일 같이 볼 수 있을까요?" 선배는 친절하게 알려준다. 내가 몰래 본 것보다 훨씬 많은 걸 가르쳐준다. 그리고 깨달았다. 죄책감은 나의 성장을 가로막았다. 당당하게 배우는 게 더 빠르다. 신입의 권리다, 질문하는 건. 이제는 서버 폴더를 여전히 본다. 하지만 몰래 보지 않는다. "선배님, 이 파일 구조 참고해도 될까요?" "네, 당연하죠. 같이 볼까요?" 이게 정답이었다. 배우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 모르는 걸 숨기는 게 부끄러운 거다. 요즘 신입이 들어왔다. 나보다 6개월 늦게. 어제 그 신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님, 레이어 정리 어떻게 하세요?" 나는 내 파일을 열어서 보여줬다. "이렇게 하면 돼요. 필요하면 제 파일 참고해도 돼요." 그 신입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 얼굴을 보면서 알았다. 내가 받은 걸 돌려주는 거구나.죄책감 대신 질문을 배웠다. 그게 진짜 성장이었다.

무드보드는 뭘 모아야 하는 걸까요?

무드보드는 뭘 모아야 하는 걸까요?

무드보드는 뭘 모아야 하는 걸까요? "주니 씨, 이번 프로젝트 무드보드 좀 만들어봐요." 선배가 웃으면서 말했다. 가볍게.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책상으로 돌아왔다. 손이 떨렸다. 무드보드. 들어는 봤다. 만들어는 본 적 없다. 일단 Pinterest부터 켰다 뭘 모아야 하지. 일단 프로젝트 키워드를 검색했다. "미니멀 카페 인테리어". 나오는 건 다 예뻤다. 전부 저장했다. 30분 후, 핀 보드에 이미지가 47개 쌓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전부 다른 느낌이었다. 일본풍도 있고, 북유럽풍도 있고, 빈티지도 있고. "이거... 맞나?" 선배한테 보여드렸다. "음... 방향성이 좀 없네요. 뭘 말하고 싶은 거예요?" 뭘 말하고 싶은 거냐고. 나는 몰랐다. 예쁜 걸 모았을 뿐이다.유튜브를 뒤졌다 "무드보드 만드는 법" 검색. 영상이 수십 개 나왔다. 다 봤다. 공통점이 있었다. "무드보드는 분위기를 담는 거예요." "컨셉을 시각화하는 작업이죠." 알겠어. 분위기. 컨셉. 그게 뭔데. 어떤 영상에서는 색만 모았다. 어떤 영상에서는 텍스처만 모았다. 어떤 영상에서는 레퍼런스 사이트만 캡처했다. 다들 다르게 한다. 정답이 없다는 게 더 무서웠다. 다시 처음부터 멍하니 앉아 있었다. 브리핑 문서를 다시 읽었다. "20대 여성 타겟, 혼자 와도 편한 공간,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 이 문장을 계속 읽었다. '혼자 와도 편한'이 눈에 들어왔다. 그럼 뭐가 필요하지. 혼자 있을 때 편한 건 뭐지. 나는 혼자 카페 갈 때 뭘 보지. 창가 자리. 작은 테이블. 개인 공간이 확보된 느낌. 그게 무드다. 그게 컨셉이다. 조금 감이 왔다.다시 모으기 시작했다 이번엔 달랐다. "창가 좌석" "1인 테이블" "독서하는 사람" 이런 키워드로 찾았다. 색도 생각했다. 차분한 느낌이면 채도 낮은 색. 베이지, 그레이, 밝은 우드톤. 텍스처도 골랐다. 따뜻한 느낌이면 패브릭. 리넨, 울, 니트 같은 거. 조명도 중요했다. 밝으면 너무 카페 같다. 은은한 조명. 따뜻한 빛. 30개를 모았다. 이번엔 다 비슷한 느낌이었다. 선배한테 보여드렸다. "오, 이번엔 괜찮네요. 혼자 와도 편한 느낌 나요." 그 말 듣고 화장실 갔다. 울지는 않았다. 웃었다. 무드보드는 방향성이다 그 뒤로 깨달았다. 무드보드는 예쁜 거 모으는 게 아니다. 방향성을 정하는 작업이다. "우리는 이쪽으로 갈 거예요"를 보여주는 거다. 색 하나, 텍스처 하나, 레퍼런스 하나. 전부 같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 "20대 여성이 혼자 와도 편한 공간"이라는 이야기를. 그래서 지금은 무드보드 만들 때 질문한다. "이 프로젝트는 뭘 말하고 싶은 거지?" 그 답이 나오면, 모을 게 보인다.아직도 어렵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어렵다. 무드보드 만들 때마다 헤맨다. "이 이미지가 맞나?" 계속 의심한다. "이거 너무 뻔한 거 아냐?" 고민한다. 선배는 30분 만에 만든다. 나는 3시간 걸린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2개월 전엔 뭘 모아야 할지도 몰랐으니까. 지금은 적어도 "왜 이걸 모았는지"는 말할 수 있다. "이 이미지는 이런 느낌을 주려고 넣었어요." 완벽하진 않아도, 이유는 있다. 그게 성장인 거다. 무드보드 만들 때 내가 하는 것 요즘은 이렇게 한다. 1. 브리핑 읽고 키워드 뽑기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느낌을 형용사로 정리 "차분한", "따뜻한", "고급스러운" 이런 식으로2. 그 느낌이 나는 것들 떠올리기실제 경험 기반으로 "차분하다"면 내가 차분함을 느꼈던 공간 생각3. 카테고리별로 모으기색 5개 텍스처 5개 레퍼런스 10개 타이포 3개4. 전체 보면서 빼기너무 튀는 거 삭제 방향 다른 거 삭제 20개 안팎으로 정리5. 왜 이걸 골랐는지 메모나중에 설명할 때 필요 선배가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게시간은 오래 걸린다. 하지만 이 과정 거치면, 헤매는 시간이 줄어든다. 무드보드가 없으면 요즘은 안다. 무드보드 없이 작업하면 어떻게 되는지. 방향을 잃는다. "이것도 괜찮고, 저것도 괜찮고" 계속 흔들린다. 시안 5개를 만든다. 전부 다른 느낌이다. 통일성이 없다. 선배한테 피드백 받으면 전부 엎는다. "컨셉이 뭐예요?" 질문에 대답 못 한다. 무드보드가 있으면 다르다. "우리는 이 방향으로 가기로 했잖아요" 말할 수 있다. 흔들려도 돌아올 곳이 있다. 기준이 있다. 무드보드는 나침반이다. 길 잃지 않게 해주는.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주에 선배가 말했다. "주니 씨, 무드보드 실력 늘었어요." "처음엔 예쁜 것만 모았는데, 이제는 의도가 보여요." 그 말 듣고 기분이 좋았다. 3개월 전에 화장실에서 울었던 게 생각났다. "무드보드는 연습이에요. 많이 만들어보는 수밖에 없어요." 선배 말이 맞았다. 처음엔 뭘 모아야 할지 몰랐지만, 지금은 조금 안다. 완벽하진 않아도, 방향은 안다. 그게 전부다. 지금 막막한 사람에게 만약 지금 무드보드 앞에서 막막하다면. 일단 브리핑을 다시 읽어라. 키워드를 찾아라. 형용사를 찾아라. "이 프로젝트는 뭘 말하고 싶은 거지?" 그 질문에 답하면, 모을 게 보인다. 예쁜 거 모으지 마라. 방향 맞는 거 모아라. 5개만 모아도 괜찮다. 그 5개가 같은 이야기를 하면 된다. 처음엔 3시간 걸려도 괜찮다. 나중엔 1시간으로 줄어든다. 무드보드는 감이 아니다. 연습이다. 훈련이다. 많이 만들어봐라. 실패해봐라. 엎어봐라.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안다. "아, 이게 무드보드구나." 오늘도 무드보드 오늘도 새 프로젝트가 들어왔다. "무드보드 만들어봐요." 이제는 덜 떨린다. 무서워도, 뭘 해야 할지는 안다. 브리핑 읽고, 키워드 뽑고, 느낌 떠올리고, 모으고, 정리한다. 3시간 걸릴 거다. 그래도 괜찮다. 2개월 전엔 방향도 몰랐으니까. 지금은 적어도 길을 안다. 완벽하지 않아도, 가고 있다. 그게 성장이다.무드보드는 예쁜 걸 모으는 게 아니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걸 모으는 거다.

피드백 받은 후 수정하는 데 3시간이 걸리는 이유

피드백 받은 후 수정하는 데 3시간이 걸리는 이유

오늘도 3시간 선배한테 피드백 받았다. 슬랙 메시지 3줄. "전체적인 톤이 좀 더 밝았으면 좋겠어요" "여백 조정 부탁드려요" "내일 오전까지 수정본 올려주세요" 읽었다. 다시 읽었다. 또 읽었다. 뭘 고치라는 건지 모르겠다.톤이 밝다는 게 "전체적인 톤이 좀 더 밝았으면" 이게 색을 밝게 하라는 건가. 아니면 분위기를 밝게 하라는 건가. 명도를 올리라는 건가. 채도를 높이라는 건가. 파일을 열었다. 일단 색부터 건드려봤다. 배경색 #F5F5F5에서 #FFFFFF로. 너무 하얗다. 다시 #F8F8F8로. 별 차이 없다. 텍스트 색도 #333333에서 #666666으로. 아니다, 더 어두워 보인다. 원복. 30분 지났다. 이미지 색감을 건드려봤다. 포토샵 켜서 Curves 조정. 밝아졌다. 근데 이게 맞나. 이것도 아닌 것 같다. 다시 원본으로. 1시간 지났다. 선배가 원한 게 이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톤'이 색상 톤이 아니라 '느낌'을 말하는 거였을 수도. 그럼 뭘 고쳐야 하는데.여백 조정 "여백 조정 부탁드려요" 어디 여백. 위쪽인가. 아래쪽인가. 좌우인가. 전체인가. 일단 다 늘려봤다. padding 20px에서 30px로. 어색하다. 너무 넓다. 다시 25px로. 이것도 아니다. 상단만 줄여봤다. 40px에서 30px로. 답답해 보인다. 하단도 건드려봤다. 60px에서 80px로. 너무 텅 비었다. 각 섹션 사이 간격도 조정했다. 50px, 60px, 70px. 다 어색하다. 원본이 뭐였는지 까먹었다. Ctrl+Z 10번 눌렀다. 1시간 반 지났다. 결국 원본이랑 거의 똑같은 상태로 돌아왔다. 여백을 5px 늘렸다 줄였다 한 게 전부다. 이게 맞는 건가. 질문하면 되는데 "선배님, 어느 부분 여백 말씀하신 건가요?" 이 한 마디면 된다. 30초면 답 온다. 근데 못 물어본다. 이런 것도 모르나 싶을까 봐. 이미 설명했는데 또 묻는다고 생각할까 봐. 귀찮게 한다고 생각할까 봐. 선배는 바쁘다. 자기 일도 있다. 내가 물어보면 손 멈추고 답해줘야 한다. 미안하다. 그래서 혼자 3시간 동안 이것저것 만져본다.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정답일 것 같은 걸 찾는다. 2시간 반 지났다.결국 올린 파일 저장했다. "최종_수정_1204_v3.fig" 슬랙에 올렸다. "수정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메시지 보내기 전에 7번 읽었다. 마침표 위치도 고민했다. 이모지 넣을까 말까 고민했다. 결국 안 넣었다. 전송. 3시간 지났다. 선배 답장 왔다. "수고했어요. 근데 제가 말한 건 메인 배너 여백이었어요. 전체 말고요." 메인 배너. 전체가 아니라 메인 배너. 파일 다시 열었다. 메인 배너 여백 조정. 10분 걸렸다. 다음에도 똑같다 이게 처음이 아니다. 다음에도 똑같을 것이다. 피드백 받으면 일단 멍하다. 뭘 고치라는 건지 정확히 모르겠다. 물어보면 된다는 걸 안다. 근데 못 물어본다. 혼자 이것저것 시도한다. 시간만 간다. 결국 틀렸다는 걸 안다. 다시 한다. 효율이 떨어진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못 고친다. 왜냐면 물어보는 게 더 무섭다. "이것도 모르면서 디자이너 하냐"는 소리 들을까 봐. 실제로는 아무도 그렇게 말 안 하는데, 내가 혼자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3시간이 걸린다.물어보는 게 3시간보다 빠르다는 걸, 사실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