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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파일을 허락 없이 열어본 내 불안감

선배 파일을 허락 없이 열어본 내 불안감

선배 파일을 허락 없이 열어본 내 불안감 그 파일을 열었다 금요일 오후 5시. 선배가 조퇴했다. "주니 씨, 먼저 갈게요. 수고하세요." "네, 편히 들어가세요." 30분 후, 나는 선배 컴퓨터 앞에 섰다. 아니, 정확히는 공용 서버 폴더였다. 선배 컴퓨터가 아니라 회사 서버. 누구나 볼 수 있는 곳. 그래도 심장이 뛰었다. 폴더명: 'OOO 메인배너_최종_0215' 클릭했다. 포토샵 파일이 열렸다. 레이어가 142개였다. 내 파일은 보통 30개 정도인데. "와..." 첫 반응은 감탄이었다. 두 번째 반응은 죄책감이었다.배우려고 한 건데 선배는 항상 파일 정리가 깔끔했다. 피드백 회의 때마다 느꼈다. "여기 이 요소는 이렇게 수정하면 돼요." 클릭 한 번에 레이어가 찾아진다. 나는 레이어를 찾다가 회의 시간을 잡아먹는다. "주니 씨, 레이어 정리 좀 해요. 나중에 본인도 못 찾아요." "네... 죄송합니다." 그래서 보고 싶었다. 선배가 어떻게 정리하는지. 그룹을 어떻게 나누는지. 이름을 어떻게 붙이는지. 학습이다. 학습. 나쁜 의도가 아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레이어를 하나씩 열어봤다. '상단_헤더_그룹' '중단_메인카피_수정본2' '하단_CTA버튼_최종' 규칙이 있었다. 위치-역할-버전. 내 레이어명은 '레이어1', '사각형2', '텍스트 복사본3' 이런 식이었다. 공책에 적었다. 선배 레이어명 규칙. 들킬까 봐 무서웠다 15분쯤 지났을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멈췄다. 급하게 파일을 닫았다. 저장하시겠습니까? 아니오. 마우스 커서가 떨렸다. 내 자리로 뛰어갔다. 의자에 앉자마자 모니터를 응시했다. 피그마를 열어뒀다. 일하는 척. 발소리는 화장실로 향했다. 다른 팀 사람이었다. "휴..." 식은땀이 났다. 등이 축축했다. 뭐가 무서운 거지? 공용 서버잖아. 누구나 볼 수 있잖아. 그런데 왜 도둑처럼 행동했지?다음 날 선배를 못 봤다 월요일 아침. 출근했다. 선배가 "주니 씨, 주말 잘 보냈어요?" 물었다. "네, 잘 보냈어요." 평소와 같았다. 그런데 내가 이상했다. 선배 얼굴을 제대로 못 봤다. 눈을 마주치면 들킬 것 같았다. 뭘 들키는데? 아무것도 안 했는데? "주니 씨, 이번 작업은 레이어 정리 잘 해봐요."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크게 했다. 목소리에 떨림이 있었다. 그날 작업하면서 선배 레이어 규칙을 써봤다. '상단_로고_그룹', '중단_타이틀_ver1'. 신기하게 찾기가 쉬웠다. 수정할 때도 빨랐다. "오, 주니 씨 레이어 정리 많이 좋아졌네요." 선배가 칭찬했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당신 파일 봤다고 말해야 하나? "감사합니다. 더 잘하겠습니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했다. 다른 파일도 열어봤다 그 후로 습관이 됐다. 선배 조퇴하는 날, 외근 가는 날, 연차 쓰는 날. 서버 폴더를 열었다. 처음엔 레이어 구조만 봤다. 나중엔 색상 팔레트를 봤다. 어떤 폰트를 쓰는지, 자간을 얼마나 주는지, 여백을 어떻게 조절하는지. 공책이 채워졌다. '선배 작업 노트'. 집에 숨겨뒀다. 실력은 늘었다. 피드백 받는 횟수가 줄었다. 팀장님이 "주니 씨, 요즘 성장 빠르네요" 했다. 기뻤다. 동시에 찝찝했다. 이건 내 실력인가? 선배를 훔쳐본 결과인가?선배한테 들켰다 지난주 목요일이었다. "주니 씨, 잠깐 얘기할까요?" 선배가 회의실로 불렀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네, 네..." 회의실 문을 닫았다. 둘만 남았다. "혹시... 제 작업 파일 본 적 있어요?" 끝났다. 들켰다. "저, 저는..." 변명이 안 나왔다. 손이 떨렸다. "아니, 화내려는 거 아니에요." 선배가 웃었다. "요즘 주니 씨 레이어 구조가 제 스타일이랑 똑같더라고요. 색상 조합도 비슷하고. 그래서 혹시 했는데." "죄송합니다. 배우고 싶어서... 그냥..." "아니, 좋은 거예요. 저도 신입 때 그랬거든요." "네?" "선배 파일 몰래 열어보고, 폰트 조합 따라하고. 그렇게 배웠어요. 다들 그래요." 선배가 말을 이었다. "근데 다음부턴 물어봐요. 같이 보면서 설명해줄게요. 그게 더 빨라요." 눈물이 날 뻔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주니 씨, 요즘 진짜 잘하고 있어요. 스스로 찾아서 배우는 거, 쉽지 않은데." 죄책감의 정체 그날 저녁, 집에 와서 생각했다. 왜 그렇게 불안했을까. 왜 도둑질하는 기분이었을까. 결론은 이거였다. 나는 내가 부족하다고 느꼈던 거다. 당당하게 물어볼 만큼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고. 선배 시간을 뺏을 자격이 없다고. 그래서 몰래 봤던 거다. 근데 선배는 당연하다고 했다. 신입은 원래 그렇게 배운다고. 내가 나를 너무 몰아세웠다. 배우고 싶어서 찾아본 건데. 성장하고 싶어서 노력한 건데. 그걸 죄책감으로 느낄 필요가 있었나. 지금은 선배한테 물어본다. "이 부분 어떻게 하신 거예요?" "파일 같이 볼 수 있을까요?" 선배는 친절하게 알려준다. 내가 몰래 본 것보다 훨씬 많은 걸 가르쳐준다. 그리고 깨달았다. 죄책감은 나의 성장을 가로막았다. 당당하게 배우는 게 더 빠르다. 신입의 권리다, 질문하는 건. 이제는 서버 폴더를 여전히 본다. 하지만 몰래 보지 않는다. "선배님, 이 파일 구조 참고해도 될까요?" "네, 당연하죠. 같이 볼까요?" 이게 정답이었다. 배우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 모르는 걸 숨기는 게 부끄러운 거다. 요즘 신입이 들어왔다. 나보다 6개월 늦게. 어제 그 신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님, 레이어 정리 어떻게 하세요?" 나는 내 파일을 열어서 보여줬다. "이렇게 하면 돼요. 필요하면 제 파일 참고해도 돼요." 그 신입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 얼굴을 보면서 알았다. 내가 받은 걸 돌려주는 거구나.죄책감 대신 질문을 배웠다. 그게 진짜 성장이었다.

무드보드는 뭘 모아야 하는 걸까요?

무드보드는 뭘 모아야 하는 걸까요?

무드보드는 뭘 모아야 하는 걸까요? "주니 씨, 이번 프로젝트 무드보드 좀 만들어봐요." 선배가 웃으면서 말했다. 가볍게.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책상으로 돌아왔다. 손이 떨렸다. 무드보드. 들어는 봤다. 만들어는 본 적 없다. 일단 Pinterest부터 켰다 뭘 모아야 하지. 일단 프로젝트 키워드를 검색했다. "미니멀 카페 인테리어". 나오는 건 다 예뻤다. 전부 저장했다. 30분 후, 핀 보드에 이미지가 47개 쌓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전부 다른 느낌이었다. 일본풍도 있고, 북유럽풍도 있고, 빈티지도 있고. "이거... 맞나?" 선배한테 보여드렸다. "음... 방향성이 좀 없네요. 뭘 말하고 싶은 거예요?" 뭘 말하고 싶은 거냐고. 나는 몰랐다. 예쁜 걸 모았을 뿐이다.유튜브를 뒤졌다 "무드보드 만드는 법" 검색. 영상이 수십 개 나왔다. 다 봤다. 공통점이 있었다. "무드보드는 분위기를 담는 거예요." "컨셉을 시각화하는 작업이죠." 알겠어. 분위기. 컨셉. 그게 뭔데. 어떤 영상에서는 색만 모았다. 어떤 영상에서는 텍스처만 모았다. 어떤 영상에서는 레퍼런스 사이트만 캡처했다. 다들 다르게 한다. 정답이 없다는 게 더 무서웠다. 다시 처음부터 멍하니 앉아 있었다. 브리핑 문서를 다시 읽었다. "20대 여성 타겟, 혼자 와도 편한 공간,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 이 문장을 계속 읽었다. '혼자 와도 편한'이 눈에 들어왔다. 그럼 뭐가 필요하지. 혼자 있을 때 편한 건 뭐지. 나는 혼자 카페 갈 때 뭘 보지. 창가 자리. 작은 테이블. 개인 공간이 확보된 느낌. 그게 무드다. 그게 컨셉이다. 조금 감이 왔다.다시 모으기 시작했다 이번엔 달랐다. "창가 좌석" "1인 테이블" "독서하는 사람" 이런 키워드로 찾았다. 색도 생각했다. 차분한 느낌이면 채도 낮은 색. 베이지, 그레이, 밝은 우드톤. 텍스처도 골랐다. 따뜻한 느낌이면 패브릭. 리넨, 울, 니트 같은 거. 조명도 중요했다. 밝으면 너무 카페 같다. 은은한 조명. 따뜻한 빛. 30개를 모았다. 이번엔 다 비슷한 느낌이었다. 선배한테 보여드렸다. "오, 이번엔 괜찮네요. 혼자 와도 편한 느낌 나요." 그 말 듣고 화장실 갔다. 울지는 않았다. 웃었다. 무드보드는 방향성이다 그 뒤로 깨달았다. 무드보드는 예쁜 거 모으는 게 아니다. 방향성을 정하는 작업이다. "우리는 이쪽으로 갈 거예요"를 보여주는 거다. 색 하나, 텍스처 하나, 레퍼런스 하나. 전부 같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 "20대 여성이 혼자 와도 편한 공간"이라는 이야기를. 그래서 지금은 무드보드 만들 때 질문한다. "이 프로젝트는 뭘 말하고 싶은 거지?" 그 답이 나오면, 모을 게 보인다.아직도 어렵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어렵다. 무드보드 만들 때마다 헤맨다. "이 이미지가 맞나?" 계속 의심한다. "이거 너무 뻔한 거 아냐?" 고민한다. 선배는 30분 만에 만든다. 나는 3시간 걸린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2개월 전엔 뭘 모아야 할지도 몰랐으니까. 지금은 적어도 "왜 이걸 모았는지"는 말할 수 있다. "이 이미지는 이런 느낌을 주려고 넣었어요." 완벽하진 않아도, 이유는 있다. 그게 성장인 거다. 무드보드 만들 때 내가 하는 것 요즘은 이렇게 한다. 1. 브리핑 읽고 키워드 뽑기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느낌을 형용사로 정리 "차분한", "따뜻한", "고급스러운" 이런 식으로2. 그 느낌이 나는 것들 떠올리기실제 경험 기반으로 "차분하다"면 내가 차분함을 느꼈던 공간 생각3. 카테고리별로 모으기색 5개 텍스처 5개 레퍼런스 10개 타이포 3개4. 전체 보면서 빼기너무 튀는 거 삭제 방향 다른 거 삭제 20개 안팎으로 정리5. 왜 이걸 골랐는지 메모나중에 설명할 때 필요 선배가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게시간은 오래 걸린다. 하지만 이 과정 거치면, 헤매는 시간이 줄어든다. 무드보드가 없으면 요즘은 안다. 무드보드 없이 작업하면 어떻게 되는지. 방향을 잃는다. "이것도 괜찮고, 저것도 괜찮고" 계속 흔들린다. 시안 5개를 만든다. 전부 다른 느낌이다. 통일성이 없다. 선배한테 피드백 받으면 전부 엎는다. "컨셉이 뭐예요?" 질문에 대답 못 한다. 무드보드가 있으면 다르다. "우리는 이 방향으로 가기로 했잖아요" 말할 수 있다. 흔들려도 돌아올 곳이 있다. 기준이 있다. 무드보드는 나침반이다. 길 잃지 않게 해주는.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주에 선배가 말했다. "주니 씨, 무드보드 실력 늘었어요." "처음엔 예쁜 것만 모았는데, 이제는 의도가 보여요." 그 말 듣고 기분이 좋았다. 3개월 전에 화장실에서 울었던 게 생각났다. "무드보드는 연습이에요. 많이 만들어보는 수밖에 없어요." 선배 말이 맞았다. 처음엔 뭘 모아야 할지 몰랐지만, 지금은 조금 안다. 완벽하진 않아도, 방향은 안다. 그게 전부다. 지금 막막한 사람에게 만약 지금 무드보드 앞에서 막막하다면. 일단 브리핑을 다시 읽어라. 키워드를 찾아라. 형용사를 찾아라. "이 프로젝트는 뭘 말하고 싶은 거지?" 그 질문에 답하면, 모을 게 보인다. 예쁜 거 모으지 마라. 방향 맞는 거 모아라. 5개만 모아도 괜찮다. 그 5개가 같은 이야기를 하면 된다. 처음엔 3시간 걸려도 괜찮다. 나중엔 1시간으로 줄어든다. 무드보드는 감이 아니다. 연습이다. 훈련이다. 많이 만들어봐라. 실패해봐라. 엎어봐라.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안다. "아, 이게 무드보드구나." 오늘도 무드보드 오늘도 새 프로젝트가 들어왔다. "무드보드 만들어봐요." 이제는 덜 떨린다. 무서워도, 뭘 해야 할지는 안다. 브리핑 읽고, 키워드 뽑고, 느낌 떠올리고, 모으고, 정리한다. 3시간 걸릴 거다. 그래도 괜찮다. 2개월 전엔 방향도 몰랐으니까. 지금은 적어도 길을 안다. 완벽하지 않아도, 가고 있다. 그게 성장이다.무드보드는 예쁜 걸 모으는 게 아니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걸 모으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