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눈치'라는 과목이 가장 어렵다

직장에서 '눈치'라는 과목이 가장 어렵다

직장에서 ‘눈치’라는 과목이 가장 어렵다

6시라는 숫자의 의미

계약서에는 6시 퇴근이라고 써있다. 근로계약서 3페이지, 근무시간 항목에 분명히.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점심시간 1시간 제외.

그런데 6시가 되어도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다. 선배들은 여전히 모니터를 보고 있다. 팀장님은 회의실에서 전화 중이다.

나만 시계를 본다. 5분마다.

6시 5분. 마우스를 천천히 움직인다. 저장 버튼을 누르는 척.

6시 10분. 화장실 갈까 고민한다. 가는 척하고 돌아오면 6시 15분.

6시 20분. 슬랙 메시지가 온다. “주니님 내일 9시 회의 전까지 이거 수정 가능할까요?” “네 확인하겠습니다.”

6시 25분. 이제야 선배 한 명이 일어난다. 가방을 챙기는 소리. 나도 슬금슬금 파일을 닫는다.

6시 28분.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 그래 수고했어요” 팀장님 목소리. 복도까지 걸어 나오는데 등이 뜨겁다.

눈치라는 교과서 없는 과목

대학교 4년 동안 배운 적 없다. 디자인 원론, 타이포그래피, 색채학. 그런 건 배웠다.

‘상사가 있을 때 퇴근하는 법’ ‘선배들 눈치 보며 자리 뜨는 타이밍’ 이런 건 교양 과목에도 없었다.

입사 첫날 인사팀이 말했다. “우리 회사는 6시 퇴근이에요.” “칼퇴 가능합니다.” “워라밸 중시하는 문화예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6시에 퇴근해도 아무도 뭐라 안 한다. 실제로 매일 6시에 나가는 사람도 있다. 3년차 선배님, 아이 둘 키우는.

하지만 나는 못 나간다. 매일 6시 반. 어떤 날은 7시. 금요일은 용기 내서 6시 10분.

차이가 뭘까. 3년차와 신입의 차이. 애 둘과 싱글의 차이. 아니면 그냥 마음가짐의 차이.

조건부 퇴근의 룰

규칙 1: 팀장이 회의 중이면 나갈 수 있다. 전화 통화 중, 외근 중, 재택 중. 이럴 때는 비교적 자유롭다.

규칙 2: 선배 한 명 이상은 남아있어야 한다. 둘 다 퇴근하면 나도 갈 수 있다. 한 명이라도 있으면 고민해야 한다.

규칙 3: 금요일은 예외다. 모두가 빨리 가고 싶어 한다. 6시 10분이면 용납된다.

규칙 4: 월요일은 더 어렵다. 주말 쉬었으니 더 할 수 있다는 분위기. 6시 반도 이른 감이 있다.

규칙 5: 내가 급한 일이 있으면 말해야 한다. “오늘 좀 급한 일이 있어서요.” 이 한마디가 입 밖으로 안 나온다.

어제는 6시 40분에 나갔다. 팀장님이 “이거 내일까지” 하셨다. 선배는 7시까지 있을 것 같았다. 나만 나가면 선배가 더 일하는 것 같았다.

그냥 앉아있었다. 딱히 할 일은 없었다. 파일 정리하는 척. 레퍼런스 찾는 척.

6시 35분에 선배가 일어났다. “나 먼저 갈게.” “네 들어가세요.”

그제야 나도 5분 뒤에 일어났다. 왜 5분을 기다렸을까. 동시에 나가면 이상한가. 나도 모르겠다.

눈치의 정량화

오늘 눈치 점수를 계산해봤다.

팀장님 재석 여부: +30점 선배 A 재석 여부: +20점 선배 B 재석 여부: +20점 요일 계수: 월요일 +10점, 금요일 -10점 날씨: 비 오면 +5점 내 마감 업무 존재 여부: +15점

60점 이상이면 못 나간다. 40점 이하면 나갈 수 있다. 50점은 애매하다.

오늘은 78점이었다. 월요일(+10), 팀장 있음(+30), 선배 둘 다 있음(+40). 비는 안 옴(0), 내 마감은 없음(0).

결과: 6시 32분 퇴근.

어제는 42점. 금요일(-10), 팀장 외근(0), 선배 A만 있음(+20), 비 옴(+5), 마감 있음(+15).

결과: 6시 15분 퇴근. 그것도 화장실 다녀온 척하고.

입사 동기와의 대화

점심시간에 입사 동기랑 통화했다. 다른 회사 마케터.

“너네도 눈치 봐?” “응. 우리도.” “몇 시에 나가?” “6시 반쯤?” “나도.”

둘 다 웃었다. 웃긴 게 아니라 그냥 웃었다.

“근데 신기한 게” 동기가 말했다. “선배들도 예전엔 눈치 봤대.” “그 선배들 위에 선배 있을 때.”

“그럼 우리가 선배 되면?” “후배들이 우리 눈치 보겠지.”

“악순환이네.” “그니까.”

통화 끊고 생각했다. 내가 3년차 되면 달라질까. 후배 생기면 “먼저 가”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나도 그냥 6시 반까지 있게 될까. 그게 익숙해져서. 퇴근이 6시 반인 줄 알고.

용기를 내본 날

한 번 용기를 낸 적 있다. 3개월 전.

친구 생일이었다. 저녁 7시 홍대 약속. 6시에 나가야 했다.

오후 4시에 팀장님한테 말했다. “오늘 좀 급한 일이 있어서 6시에 나가도 될까요?”

“응? 어 그래.” “우리 6시 퇴근 아니야?”

그 말에 얼굴이 빨개졌다. “아 네 그렇긴 한데…” “그럼 가면 되지.”

맞는 말이다. 6시 퇴근이니까 6시에 가면 된다. 허락 받을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날 6시에 나갈 때.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하고 나올 때. 여전히 등이 뜨거웠다.

복도에서 문자가 왔다. 팀장님한테. “내일 출근하면 얘기 좀 하자.”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뭘 잘못했지. 6시 퇴근이라며.

다음날 아침. 팀장님이 부르셨다.

“어제 얘기한 거.” “응?” “급한 일 있으면 미리미리 말해.” “어제 4시에 말했잖아. 그럼 인수인계 시간이 부족해.” “적어도 전날은 말해줘.”

“아 네…”

혼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속상했다. 6시 퇴근인데. 왜 전날 미리 말해야 하지.

적응과 포기 사이

요즘은 6시 반이 익숙하다. 딱히 불편하지 않다. 어차피 집 가도 할 일 없다.

유튜브 보거나. 넷플릭스 보거나. 누워있거나.

30분이 그렇게 아까운 시간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편하다.

하지만 가끔은 생각한다. 이게 적응인가 포기인가.

매일 30분씩. 일주일이면 2시간 반. 한 달이면 10시간. 일 년이면 120시간.

5일을 공짜로 주는 것과 같다. 5일 동안 뭘 할 수 있을까.

제주도 다녀올 수 있다. 책 5권 읽을 수 있다. 새로운 취미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매일 30분은 그냥 사라진다. 눈치를 보다가.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가.

이 글을 쓰는 이유

오늘도 6시 28분에 나왔다. 엘리베이터에서 거울을 봤다. 피곤한 얼굴.

문득 궁금했다. 다른 사람들도 이럴까. 신입들은 다 이럴까.

그래서 쓴다. 누군가 읽고 위로받으면 좋겠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그리고 나중에. 내가 3년차, 5년차 될 때. 이 글을 다시 읽고 싶다.

그때는 후배한테 “먼저 가” 할 수 있기를. 눈치 안 봐도 되는 사람이 되기를.

지금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오늘도 6시 반. 내일도 그럴 것 같다. 그래도 쓴다, 언젠가 달라질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