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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어
- 25 Dec, 2025
상세페이지 배너 배너 반복 - 이게 성장인가요?
오늘도 상세페이지 월요일 9시 30분. 슬랙에 메시지가 떴다. "주니씨, 이번 주 상세페이지 5개 부탁드려요. 레퍼런스 공유했어요." 레퍼런스를 열었다. 지난주에 만든 거랑 똑같다. 사이즈만 다르다. 1200x3000에서 1200x3500으로. 포토샵을 켰다. 지난주 파일을 복사했다. "최종_최종2_진짜최종_1204" 이걸 "최종_1211"로 바꿨다. 이미지 교체. 텍스트 수정. 정렬 확인. 저장. 다음 파일. 30분 만에 첫 번째 완성.점심시간까지 3개를 더 만들었다. 급식 먹으면서 생각했다. 이게 성장인가. 숫자로 본 2년 입사한 게 2023년 1월이다. 지금 2024년 12월. 만든 상세페이지: 약 240개 만든 배너: 약 480개 리사이즈 작업: 세기 싫다 포트폴리오에 넣을 만한 건: 2개 이직 준비 중인 부트캠프 동기가 물었다. "너 최근 작업 중에 뭐 보여줄 만해?" 말이 안 나왔다. 상세페이지는 다 비슷하다. 배너도 다 비슷하다. 회사 브랜딩 가이드를 따르니까. "일은 많이 했는데 보여줄 게 없네." 동기가 웃었다. "나도."웃을 일이 아닌데 웃었다. 선배가 말했다 목요일 오후. 선배한테 시안을 보여드렸다. "주니야, 이거 지난주랑 똑같은데?" "네... 레퍼런스가 똑같아서요." 선배가 모니터를 봤다. 한참 봤다. "그럼 다르게 만들어봐. 레이아웃이라도." "...네?" "같은 거 100번 만드는 게 능력이 아니야. 더 나은 방법 찾는 게 능력이지." 회의실에서 나왔다. 다시 앉았다. 더 나은 방법. 뭐가 더 나은 건데. 레퍼런스는 이미 좋다. 클릭률도 괜찮다고 했다. 바꿀 이유가 없다. 그런데 왜 바꾸래.피그마를 켰다. 유튜브에서 본 레이아웃을 따라 해봤다. 2시간 걸렸다. 평소의 4배다. 선배한테 다시 보여드렸다. "오, 괜찮은데? 이게 낫다." 2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칭찬이 들어서. 그런데 금요일에 대표님이 말했다. "이전 버전이 더 깔끔한데요? 원래대로 해주세요." 반복의 의미 토요일. 카페에서 포트폴리오를 정리했다. 2년 동안 만든 파일을 쭉 봤다. 2023년 3월 작업: 디테일이 엉망이다. 여백도 들쭉날쭉. 2023년 9월 작업: 많이 나아졌다. 정렬이 깔끔해졌다. 2024년 6월 작업: 속도가 빨라졌다. 퀄리티는 유지. 2024년 12월 작업: ...똑같다. 6월이랑. 성장이 멈췄다. 아니, 성장한 건 맞다. 작업 속도. 파일 정리. 커뮤니케이션. 그런데 디자인은. 같은 걸 빠르게 만드는 사람이 됐다. 새로운 걸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핸드폰을 봤다. 디자인 계정 팔로워 32명. 3개월째 그대로다. 올리는 것도 회사 상세페이지 일부분. 리액션 없다. "이런 거 누가 봐." 혼잣말이 나왔다. 유명한 디자이너 계정을 봤다. 팔로워 8만. 올린 작업들: 브랜딩, UI, 타이포, 굿즈. 다 다르다. 다 새롭다. 다 멋있다. 나는 상세페이지 240개. 비교가 됐다. 팀장님 면담 화요일. 팀장님이 불렀다. "주니씨, 2년 됐죠? 내년 목표 같이 얘기해봐요." 준비 안 했다. 그냥 말했다. "더 다양한 작업 해보고 싶어요." "어떤 거요?" "상세페이지 말고... 브랜딩이나, 메인 비주얼 같은 거요." 팀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면 지금 작업부터 잘해야죠. 상세페이지도 브랜딩이에요." "...네?" "매번 같은 레이아웃 쓰는 게 게으른 거예요. 같은 조건에서 더 나은 걸 찾는 게 진짜 실력이고." 선배가 했던 말이랑 같다. "지금 주는 일 대충하고 다른 거 하고 싶다는 건, 순서가 바뀐 거예요." 할 말이 없었다. "다음 주부터 상세페이지 하나를 A/B 테스트 해봐요. 두 버전 만들어서 클릭률 비교하는 거. 어떤 게 더 잘 나오는지." "...해도 돼요?" "당연하죠. 제안해봐요. 데이터 쌓이면 그게 포트폴리오예요." 회의실에서 나왔다. 상세페이지가 다르게 보였다. 갑자기. A/B 테스트 제안 수요일. 마케팅팀 회의. 손을 들었다. 떨렸다. "저, 제안 하나 해도 될까요?" 마케팅 팀장이 봤다. "어, 주니씨? 어떤 거요?" "상세페이지를 두 버전 만들어서 클릭률 비교해보면 어떨까요. 레이아웃 테스트 같은 거요." "...오?" 마케팅 선임이 관심을 보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요?" 준비한 화면을 공유했다. 어젯밤에 2시간 걸려서 만든 자료. 버전 A: 기존 레이아웃 (세로형, 정보 위주) 버전 B: 새 레이아웃 (카드형, 비주얼 위주) "2주 돌려보고 클릭률이랑 체류 시간 비교해보면, 뭐가 더 효과적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마케팅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데요? 이거 개발 공수 얼마나 들어요?" 개발팀 선배(남자친구)가 말했다. "이 정도면 하루?" "그럼 다음 주 상품 출시할 때 해봐요. 주니씨가 두 버전 만들고." 회의 끝나고 자리로 돌아왔다. 선배가 톡을 보냈다. "굿. 이게 성장이야." 2주 후 A/B 테스트 결과가 나왔다. 버전 B(새 레이아웃): 클릭률 12% 높음, 체류시간 40초 더 긺. 슬랙에 마케팅 팀장이 올렸다. "주니씨 제안한 레이아웃이 훨씬 낫네요. 다음부터 이걸로 가시죠." 팀 칭찬. 처음이다. 선배가 자리로 왔다. "야, 너 이거 외부 공모전에 내봐. '데이터 기반 디자인 개선 사례'로." "...공모전이요?" "응. 포트폴리오감 아니야, 이거?" 맞다. 같은 상세페이지인데, 이번엔 다르다. "반복 작업을 개선한 과정"이 있다. "결과 데이터"가 있다. 그날 저녁. 남자친구랑 퇴근했다. "오늘 기분 좋아 보인다." "응. 내가 제안한 게 받아들여져서." "당연하지. 좋은 아이디어였어." "근데 있잖아, 나 계속 똑같은 것만 만드는 줄 알았거든." "맞잖아. 상세페이지 매일 만들잖아." "근데 그 안에서도 다르게 할 수 있는 거였어. 내가 안 찾아본 거지." 남자친구가 웃었다. "그걸 이제 알았네." 반복과 숙련 사이 금요일 저녁. 개인 작업 시간. 공모전 포트폴리오를 정리한다.문제 인식: 같은 레이아웃 반복 → 개선점 찾기 어려움 가설 설정: 비주얼 중심 레이아웃이 더 효과적일 것 실행 과정: A/B 테스트 제안 및 진행 결과: 클릭률 12% 개선, 체류시간 40초 증가 학습: 반복 업무 안에서도 데이터 기반 개선 가능쓰고 보니 그럴듯하다. 2주 전까지만 해도 "의미 없는 반복"이었다. 지금은 "개선 과정이 담긴 사례"다. 같은 일인데 다르게 보인다. 포트폴리오 파일 이름을 지었다. "240번의 상세페이지가 가르쳐준 것" 부트캠프 동기 단톡방에 올렸다. "나 공모전 낸다." 반응이 빨랐다. "오 뭔데?" "주니 드디어?" "보여줘봐" 초안을 공유했다. "미쳤다. 이거 당선감인데?" "데이터까지 있으면 진짜 강한데." "나도 회사에서 이런 거 해봐야겠다." 핸드폰을 내려놨다. 인스타 디자인 계정을 열었다. 팔로워 32명. 이번 주 작업을 올렸다. A/B 테스트 과정을 정리해서. 30분 만에 좋아요 12개. 댓글 2개. "오 이런 접근 좋네요" "주니어가 이런 제안까지 하다니, 멋있어요" 작다. 그래도 반응이 있다. 월요일 아침 출근했다. 슬랙을 켰다. "주니씨, 이번 주 상세페이지 4개 부탁드려요." 레퍼런스를 열었다. 지난달에 만든 거랑 비슷하다. 예전 같으면 한숨 나왔다. 지금은 다르다. "기존 레퍼런스 참고해서, 개선안도 하나 만들어볼게요. 비교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마케팅 선임이 답했다. "오 좋죠. 기대할게요." 포토샵을 켰다. 그리고 피그마도 켰다. 기존 방식으로 하나. 새 시도로 하나. 시간은 두 배 걸린다. 괜찮다. 선배가 지나가다 봤다. "두 개 만들어?" "네. 비교하려고요." "굿. 그게 맞아." 점심시간. 급식 먹으면서 생각했다. 여전히 상세페이지를 만든다. 매일. 여전히 반복이다. 그런데 다르다. "같은 걸 빠르게"에서 "더 나은 걸 찾으며"로 바뀌었다. 이게 성장이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핸드폰을 봤다. 공모전 제출 완료 메일이 왔다. "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결과는 1월 중 발표됩니다." 떨어질 수도 있다. 괜찮다. 중요한 건, 낼 게 생겼다는 것. 남자친구한테 톡을 보냈다. "냈어. 공모전." "ㅊㅊ 결과 나오면 밥 사줄게" "결과 상관없이 사줘" "ㅋㅋㅋ 그래" 집에 도착했다. 샤워하고 침대에 누웠다. 2년 전 이맘때가 생각났다. "디자이너로 취업했다!" 기쁘고 떨렸다. 6개월 후. "매일 똑같은 일만..." 지루했다. 1년 후. "내가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 불안했다. 2년 차. 지금. "반복 안에서 다르게 하는 법을 안다." 조금 자신감 생겼다. 성장이 뭔지 몰랐다. 거창한 프로젝트를 해야 성장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같은 일을 다르게 보는 것. 개선점을 찾는 것. 데이터를 쌓는 것. 그게 성장이었다. 상세페이지 240개가 쓸모없는 게 아니었다. 240번의 기회였다. 내일도 상세페이지를 만든다. 241번째다. 이번엔 또 뭘 다르게 해볼까. 그 생각을 하니까 월요일이 기대된다. 신기하다.반복이 정체가 아니라 재료였다.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였다.
- 16 Dec, 2025
선배 디자인 옆에 내 디자인을 놓았을 때
같은 파일명, 다른 세계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팀장님이 슬랙을 쳤다. "주니, 현진 씨랑 같은 컨셉으로 각자 시안 한 번씩 뽑아봐. 금요일 오전까지." 같은 브리핑. 같은 레퍼런스. 같은 마감. 현진 선배 경력은 5년. 나는 2년 3개월.목요일 밤 11시에 파일을 저장했다. "최종_배너_주니_1124_v3.fig" 금요일 아침, 선배 파일이 올라와 있었다. "배너_현진_최종.fig" 버전 넘버도 없다. 한 번에 끝냈다는 뜻이다. 20분의 침묵 회의실에 모니터 두 대를 켰다. 왼쪽에 선배 시안. 오른쪽에 내 시안. 같은 브리핑이 맞나 싶었다. 선배 건 보는 순간 알았다. "아, 이거다." 내 건 보는 순간도 알았다. "아, 이게 아닌데." 팀장님이 20분 동안 두 개를 번갈아 봤다. 나는 책상 모서리를 손톱으로 긁었다. "주니 거, 요소는 다 들어갔는데..." 들어갔는데. 이 말 뒤에는 항상 문제가 온다. "현진 거는 한눈에 들어오네. 이걸로 가자." 회의가 끝났다. 선배는 자리로 돌아가서 다른 작업을 시작했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물을 마셨다. 10분 동안.파일을 열었다 점심시간에 혼자 남아서 두 파일을 나란히 띄웠다. 선배 파일부터. 레이어 이름이 정갈하다. "bg_gradient", "cta_button", "text_headline". 내 파일. "사각형 1 복사본 3", "그룹 해제 23", "레이어 189". 이건 정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선배 시안은 여백이 숨을 쉰다. 내 시안은 여백이 불안하다. 뭔가 더 채워야 할 것 같다. 선배 건 폰트가 두 개다. 본문, 강조. 끝. 내 건 폰트가 네 개다. 각각 다 이유가 있었는데 지금 보니 산만하다. 선배 건 색이 세 개다. 메인, 서브, 포인트. 내 건 색이... 스포이트로 찍어봤다. 일곱 개다. "통일성"이라는 게 이런 건가. 대체 어떻게 이렇게 선택을 적게 하는데 더 풍부해 보이는 거지. 구조를 뜯어봤다 선배 시안을 레이어별로 껐다 켰다 해봤다. 타이틀 끄니까 CTA 버튼이 자연스럽게 시선을 끈다. 버튼 끄니까 이미지가 말을 한다. 이미지 끄니까 배경 그라데이션이 공간을 잡는다. 뭘 빼도 무너지지 않는다. 내 시안은. 타이틀 끄니까 허전하다. 버튼 끄니까 어디 봐야 할지 모르겠다. 이미지 끄니까 텅 빈다. 각 요소가 서로를 안 믿는다. 혼자 목소리를 높인다. 30분 동안 레이어를 켰다 껐다 반복했다. 답은 여기 있는데. 내가 못 읽는 거다.센스냐, 경험이냐 퇴근길 지하철에서 현진 선배한테 슬랙을 보냈다. "선배, 제 시안이랑 선배 시안 차이가... 어디서 나는 것 같으세요?" 10분 뒤 답이 왔다. "응 나도 2년차 때 너랑 똑같았어. 요소 다 넣으려고 안간힘 썼지." "그럼 언제부터 달라진 거예요?" "음... 빼도 된다는 걸 알았을 때?" "그게 언제였어요?" "300개쯤 만들고 나니까." 300개. 나 지금 몇 개 만들었지. 회사 들어와서 배너, 상세페이지, 팝업 합쳐서... 한 80개? 220개 남았다. 220개 더 만들면 나도 저렇게 될까. 아니면 220개 만들어도 센스가 없으면 소용없는 걸까. 집에 와서 노트에 적었다. "경력 5년 = 시안 몇 개?" 계산해봤다. 주 5일, 하루 1개씩만 쳐도 연 250개. 5년이면 1,250개. 나랑 1,170개 차이. 이게 "경험"의 물리적 거리구나. 못 보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주말에 현진 선배 시안을 프린트했다. 책상에 붙이고 따라 만들어봤다. 똑같이. 레이어 이름까지 똑같이. 폰트 사이즈, 자간, 행간, 컬러 코드 전부. 3시간 걸렸다. 완성하고 나니까 뭔가 보였다. 타이틀 크기가 생각보다 크다. 겁 없이 크다. 여백이 생각보다 넓다. 불안할 만큼 넓다. 컬러가 생각보다 절제돼 있다. 심심할 만큼. 근데 이게 더 시원하다. 더 읽힌다. 더... 프로페셔널하다. 그다음 내 시안을 선배 방식으로 고쳐봤다. 폰트 4개를 2개로. 색 7개를 3개로. 요소 12개를 8개로. 여백을 1.5배로. 저장하고 봤다. "어? 이게 더 낫잖아?" 근데 이걸 처음부터 못 한 거다. 빼는 게 무서웠다. 비어 보일까 봐. 못 만든 것처럼 보일까 봐. 디자인은 더하기가 아니었다 월요일 아침, 팀장님한테 메시지 보냈다. "지난 시안, 다시 한번 수정해봐도 될까요?" "응? 이미 현진 거로 진행 들어갔는데. 왜?" "제가 뭘 놓쳤는지 알 것 같아서요. 연습 삼아서라도." "그래, 한번 해봐." 화요일 오전에 수정본 올렸다. 팀장님이 30초 보더니 말했다. "오, 이게 금요일 거야?" "네. 선배 시안 구조 분석해서 다시 짰어요." "많이 나아졌네. 이번 건 아쉽지만 다음엔 이 방향으로 가보자." 책상으로 돌아왔다. 현진 선배가 슬랙을 쳤다. "봤어. 잘했어. 근데 너 주말에 작업했지?" "네... 연습하려고요." "ㅋㅋㅋ 나도 그랬어. 2년차 때 선배 파일 몰래 뜯어봤거든. 들키면 X같아 보일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진짜요?" "응. 300개 만들라는 말 했잖아. 그중에 100개는 남 거 따라 만든 거야. 그게 제일 빨라." "감사합니다." "그래도 있잖아." "네?" "220개 더 만들어야 한다는 건 변함없어 ㅎㅎ 화이팅."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차이의 정체 그날 저녁 일기장에 적었다. "선배랑 나랑 차이. 폰트 선택? 아니다. 색 조합? 아니다. 툴 숙련도? 아니다. '빼도 된다'는 확신.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판단. '여기에 집중하자'는 우선순위. 이게 경력이다. 센스 아니다. 무서워하지 않는 것. 비어 보여도 괜찮다고 믿는 것. 220개 남았다. 무섭지만 만들어야 한다. 하나씩." 수요일 점심시간. 현진 선배 시안 하나를 또 따라 만들었다. 이번엔 2시간 반 걸렸다. 30분 줄었다. 목요일에는 2시간. 금요일에는 1시간 반. 팀장님이 새 브리핑을 던졌다. "주니, 이번 주 배너 하나 부탁해. 월요일까지." 파일을 만들었다. 레이어 이름부터 정리했다. 폰트 두 개만 열었다. 색 세 개만 찍었다. 타이틀 크기를 두 배로 키웠다. 무섭지만. 여백을 두 배로 늘렸다. 불안하지만. 요소를 네 개 뺐다. 떨리지만. 저장했다. "배너_주니_최종.fig" 버전 넘버 없이. 월요일 오전, 팀장님이 10초 보더니 말했다. "오케이. 이대로 가자." 현진 선배가 지나가다 내 모니터를 봤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데?" 그 한마디에 일주일이 버틴다.219개 남았다. 무섭지만, 오늘도 하나 더 만든다.
- 06 Dec, 2025
회의 때 고개만 끄덕끄덕하는 내가 전달한 것은 무엇인가
회의 때 고개만 끄덕끄덕하는 내가 전달한 것은 무엇인가 오늘도 끄덕였다 회의실 들어갔다. 자리는 맨 끝. 노트북 열고 펜 꺼냈다. 필기할 준비. "이번 프로젝트 컨셉 브레인스토밍 시작하겠습니다." 팀장님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니어님 생각은 어때요?" 심장이 쿵했다. "아... 네... 좋은 것 같습니다." 또 끄덕였다. 회의 끝나고 나왔다. 50분 동안 내가 한 말은 딱 세 문장. "좋은 것 같습니다", "네 맞습니다", "확인하겠습니다". 그리고 고개는 37번쯤 끄덕인 것 같다. 세진 않았지만 목이 아프다.끄덕임의 정확한 의미 집에 와서 생각했다. 내 끄덕임이 전달한 건 뭘까. '당신 말이 맞아요'였을까. 아니다. 나는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이해했어요'였을까. 그것도 아니다. 이해 못 한 부분이 태반이다. '열심히 듣고 있어요'? 이건 맞다. 근데 듣기만 하는 게 참여일까. 정확히 말하면 내 끄덕임은 이거다. '저 여기 있습니다. 방해는 안 할게요.' 회의에서 투명인간 되는 법. 고개만 끄덕이면 된다. 민수 선배가 지난주에 말했다. "주니어, 회의 때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봐." 나는 그때도 고개를 끄덕였다.침묵하는 순간들 브레인스토밍 회의는 매주 금요일 3시. 일주일 중 가장 긴장되는 시간이다. 첫 번째 침묵. "이번 메인 비주얼 어떻게 갈까요?" 머릿속에 이미지가 있다. 어제 핀터레스트에서 본 레퍼런스. 저거랑 비슷하게 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입이 안 열린다. '혹시 이거 유치한 아이디어 아닐까?' '선배들이 이미 생각한 건 아닐까?' '말했다가 이상하면 어떡하지?' 결국 아무 말도 안 했다. 성우 선배가 내가 생각한 거랑 비슷한 걸 말했다. 다들 좋다고 했다. 나는 또 끄덕였다. 두 번째 침묵. "타이포 스타일은?" 나는 산세리프가 더 맞을 것 같았다. 클라이언트 브랜드 가이드 보니까 거기도 고딕 계열 썼다. 그런데 팀장님이 명조 이야기를 꺼냈다. '아 내가 잘못 본 건가?' '가이드 다시 확인해볼까?' '지금 말하면 회의 흐름 끊는 거 아닐까?' 입 다물었다. 회의 끝나고 팀장님한테 따로 말씀드렸다. "저기... 산세리프는 어떨까요?" "아 그것도 괜찮네. 회의 때 얘기하지 그랬어." 회의 때 말할 걸. 그 순간은 지나갔다. 세 번째 침묵. "이거 너무 평범한 거 아니야?" 선배가 만든 시안 보면서 다들 얘기한다. 나도 그렇게 느꼈다. 어제 작업 파일 봤을 때부터. 그런데 그 선배는 나한테 항상 잘해준다. 점심도 사주고 퇴근길에 태워주기도 한다. '내가 뭔데 선배 시안을 평가해?' '나도 제대로 못 만들면서?' 끄덕이고 있었다.끄덕임이 만든 것들 회의 후 일주일. 컨셉 확정됐다. 명조 타이포로 갔다. 클라이언트 피드백 왔다. "브랜드랑 안 맞는 것 같은데요. 산세리프로 바꿔주세요." 팀장님이 한숨 쉬었다. "처음부터 다시네." 그때 민수 선배가 나를 봤다. 나도 선배를 봤다. 아무 말 안 했지만 둘 다 알았다. 내가 회의 때 말했으면 이런 일 없었을 거라는 걸. 야근 시작됐다. 3일 동안 타이포 다시 잡았다. 내 침묵이 만든 야근이다. 그리고 또 다른 것도 만들었다. '의견 없는 디자이너'라는 이미지. 지난주 인사팀에서 1:1 면담했다. "업무에 어려움은 없나요?" "없습니다." 고개 끄덕. "성장하고 있다고 느껴요?" "네." 고개 끄덕. 거짓말이다. 어렵고 안 자라는 것 같다. 그런데 말을 못 했다. 면담 끝나고 기록 공유받았다. '업무 만족도 높음. 특이사항 없음.' 내 끄덕임이 만든 기록이다. 실제 내 상태랑은 전혀 다른. 말하지 않으면 없는 것 성우 선배랑 술 마셨다. 취해서 물어봤다. "선배는 회의 때 어떻게 그렇게 말 잘해요?" "잘하는 거 아니야. 그냥 해." "틀리면요?" "틀리면 배우지." 간단했다. 나는 너무 복잡하게 생각했다. 선배가 또 말했다. "너 머릿속에 생각 많더라. 파일 보면 알아." "네?" "레이어 정리 되게 잘해. 디테일도 챙기고. 근데 왜 회의 때는 그걸 안 꺼내?" 몰랐다. 선배가 내 작업을 그렇게 봤다는 것도. 내가 생각이 있다는 걸 알았다는 것도. "말 안 하면 없는 거야. 디자이너는 작업만 하는 게 아니라 설명도 해야 돼." 집에 오는 길에 생각했다. 내 포트폴리오에 적힌 말들. '사용자 중심 디자인' '문제 해결 능력' '커뮤니케이션 스킬' 다 거짓말이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사용자 중심으로 생각해도 말을 안 하면 모른다. 문제를 알아도 말을 안 하면 해결 안 된다. 커뮤니케이션은 혼자 고개 끄덕이는 게 아니다. 끄덕임을 멈춘 날 이번 주 금요일 회의. 각오했다. 오늘은 꼭 말한다. "랜딩페이지 레이아웃 의견 있어요?" 손을 들었다. 떨렸다. "저... 모바일 퍼스트로 가면 어떨까요? 트래픽 데이터 보니까 모바일이 73%거든요." 다들 나를 봤다. 3초가 3시간 같았다. 팀장님이 말했다. "오 좋은데? 그럼 모바일 기준으로 잡아볼까요?" 끝이었다. 세상이 무너지지 않았다. 회의 끝나고 민수 선배가 어깨 쳤다. "오늘 좋았어. 데이터 근거 들어서 말하니까 설득력 있더라." 화장실 갔다. 거울 봤다. 여전히 똑같은 얼굴인데. 뭔가 달라 보였다. 목소리 낸 사람의 얼굴. 집에 와서 일기 썼다. '오늘 회의에서 의견 말했다. 떨렸다. 그런데 괜찮았다.' 짧은 문장이지만. 2년 동안 한 번도 쓰지 못한 문장이다. 여전히 어렵지만 다음 주 회의. 또 말했다. 이번엔 덜 떨렸다. "컬러 팔레트 좀 더 밝게 가면 어떨까요? 타겟이 2030인데 지금 톤이 너무 무거운 것 같아서요." 누가 물었다. "어떤 톤으로?" 준비 안 했던 질문이다. 당황했다. "저... 레퍼런스 찾아서 다음 회의 때 보여드려도 될까요?" 팀장님이 웃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완벽하지 않아도 됐다. 말을 시작하는 게 중요했다. 여전히 회의는 어렵다. 말하기 전에 심장 뛴다. 틀릴까 봐 무섭다. 그런데 알았다. 고개만 끄덕이는 게 더 무섭다는 걸. 침묵이 더 큰 실수라는 걸. 내 끄덕임이 전달했던 건 결국. '나는 여기 없습니다'였다. 이제는 다른 걸 전달하고 싶다. '나는 여기 있습니다. 서툴지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완벽한 의견이 아니어도 된다. 데이터가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시작하는 것. 입을 여는 것. 그게 주니어 디자이너가 회의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어제 성우 선배가 말했다. "요즘 주니어 많이 컸네. 회의 때 네 의견 듣는 게 좋아." 그 말 듣고 기분 좋아서. 저녁 내내 웃었다. 고개만 끄덕이던 내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회의실에서 고개 끄덕이는 대신, 오늘은 손을 들어본다. 떨려도.
- 05 Dec, 2025
이 길이 맞나 싶은데 다른 걸 할 줄이 없다
오늘도 이력서 열어봤다새벽 2시에 사람인 켜놓고 있었다. '경력직 디자이너 모집'이라는 공고들. 자격요건 보다가 껐다. 3년 이상. 포트폴리오 필수. 나는 2년. 포트폴리오는 있는데 보여주기 창피한. 이런 밤이 한 달에 두세 번씩 온다. 선배한테 '이건 좀...'이라는 말 들었을 때. 팀장님이 한숨 쉬실 때. 디자인 파일 열어서 한 시간 째 커서만 깜빡일 때.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나 이거 아닌가 보다.'부트캠프 동기 단톡방에 올라온 글. "취업 준비하면서 UX 라이터 쪽도 보고 있어요." 좋아요 5개. 댓글은 없다. 나도 생각해본 적 있다. 전직. 마케터도 봤고. 기획자도 봤고. 유튜버 채용 공고도 클릭해봤다. '디자인 할 줄 아는 사람 우대'라고 써있어서. 근데 지원서는 안 썼다. 2년이 아까워서. 투자한 시간들 디자인 배운다고 부트캠프 다녔다. 6개월. 600만원. 부모님이 내주셨다. "주니야, 네가 하고 싶은 거 해." 그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취준 기간 8개월. 포트폴리오 10번 갈아엎었다. 면접 15곳. 떨어진 곳 14곳. 붙은 곳이 지금 회사다. 입사하고 2년. 선배들한테 까이면서 배운 것들. 그리드 시스템. 컴포넌트 정리법. 피드백 받는 법. 아직도 부족하지만 0에서는 왔다. 이걸 다 버리고 다른 걸 시작한다? 또 신입부터? 또 면접? 또 600만원? 계산기 두드려봤다. 2년 월급 모은 거. 1500만원. 부트캠프비 600만원. 취준 기간 생활비 300만원. 총 2400만원. 이게 매몰비용인지 투자인지 모르겠다. 다른 선택지는 뭔데가끔 친구들 만난다. 대학 동기들. 다들 다른 일 한다. 은행 다니는 애는 말했다. "주니야, 디자이너 되게 좋아 보이는데? 크리에이티브하고." 웃으면서 "응, 좋아"라고 했다. 마케팅하는 애는 물었다. "연봉은 좀 오르니?" "조금씩은." 거짓말이다. 작년에 3.5프로 올랐다. 프리랜서 하는 애가 제일 솔직했다. "나도 매일 때려치울까 생각해. 근데 다른 거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그 말이 제일 찔렸다. 나도 그렇다. 디자인 빼면 뭐가 있나. 포토샵? 피그마? 어도비 일러스트? 이거 들고 뭘 하지. 영어도 토익 700점대. 코딩은 HTML 조금. 글쓰기도 블로그 일기 수준. 결국 디자인밖에 없다. 그게 제일 무섭다. 선배의 한마디 지난주 회식 자리. 선배가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니야, 나도 3년 차까지 매일 때려치울까 생각했어." "네?" "근데 5년 차 되니까 좀 보이더라. 뭘 모르는지가." 그 말이 위로가 됐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3년 더 버텨야 한다'는 협박인지. 그래도 물어봤다. "그럼 선배님은 지금 괜찮으세요?" "괜찮진 않아. 근데 이게 내 일이긴 해." 집 가는 길에 그 말 곱씹었다. '이게 내 일이긴 해.'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언제쯤. 포트폴리오 다시 열어봤다 주말에 1년 전 포트폴리오 파일 찾았다. 취준할 때 만든 거. 지금 보니까 민망하다. 레이아웃도 들쑥날쑥. 폰트도 왜 저렇게 썼지. 그래도 이걸로 붙었다. 지금 다시 만든다면? 확실히 낫게 만들 것 같다. 2년 동안 배운 게 있긴 하다. 어제 작업한 배너 다시 봤다. 선배한테 5번 피드백 받고 통과된 거. 1년 전 나는 이거 못 만들었을 거다. 성장은 하고 있는 건가. 느리지만. 사람인 북마크 폴더 열어봤다. '이직 고려' 폴더. 공고 23개. 하나도 안 지워졌다. 클릭했다가 껐다. 또 내일 보자. 그래도 아침은 온다 출근길 지하철. 가방에서 태블릿 꺼냈다. 핀터레스트 켜서 레퍼런스 저장한다. 좋은 디자인 보면 그래도 기분이 좋다. '나도 이렇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 이게 아직 있다는 게 다행인가. 회사 도착. 9시 3분. 자리 앉아서 피그마 켰다. 어제 못 끝낸 작업 이어서 한다. 팀장님이 지나가면서 말했다. "주니야, 어제 배너 괜찮던데.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이럴 때는 생각한다. '오늘은 버틸 만하네.' 그렇게 하루가 또 간다. 때려치울까 고민하면서도. 내일도 출근할 거면서.이 길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근데 지금 당장 다른 길도 없다. 그래서 오늘도 피그마를 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