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했어?'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내가 본 것
- 09 Dec, 2025
“왜 이렇게 했어?”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내가 본 것
그날의 시작
월요일 오후 3시. 선배가 내 자리로 왔다. “주니야, 배너 시안 좀 보자.”
심장이 뛰었다. 주말 내내 만든 시안이다. 레퍼런스 10개 보고, 레이아웃 3번 바꿨다. 색도 5번 바꿨다.
선배가 내 모니터를 봤다. “음.” 이 ‘음’이 제일 무섭다.

30초쯤 지났을까. 선배가 물었다. “여기 여백, 왜 이렇게 했어?”
나는 대답했다. “아… 그게…”
선배가 다시 물었다. “이 컬러는 왜 선택했어?”
“어… 레퍼런스가…”
“이 폰트 조합은요?”
”…”
입이 안 열렸다. 이유를 몰랐다.
그냥 예뻐 보여서
사실은 이랬다.
여백은 ‘그냥 이 정도면 괜찮아 보여서’. 컬러는 ‘레퍼런스 중에 하나가 이 색이어서’. 폰트는 ‘요즘 많이 쓰는 거라서’.
전부 ‘그냥’이었다. ‘왜냐하면’이 없었다.
선배가 말했다. “주니야, 디자인은 이유가 있어야 해.” “클라이언트가 물어보면 뭐라고 할 거야?”
화장실 가서 울었다. 10분 있다가 나왔다. 눈 부은 거 들킬까 봐 세수했다.

그날 밤
집에 와서 시안을 다시 봤다. 정말 이유가 없었다.
왜 이 여백인지. 왜 이 색인지. 왜 이 서체인지.
하나도 설명 못 한다.
레퍼런스 폴더를 열었다. 10개가 저장돼 있다. 근데 왜 저장했는지 모르겠다. ‘예쁘다’는 이유뿐.
뭘 배운 건지. 뭘 적용한 건지. 전혀 모르겠다.
그냥 따라 한 거다. 보기 좋게. ‘감’으로.
선배의 파일
다음 날. 선배 파일을 몰래 열었다.
레이어 이름부터 달랐다. ‘여백_상단_시각적균형_40px’ ‘메인컬러_브랜드아이덴티티_#FF5733’ ‘헤드라인_가독성우선_Pretendard_Bold’
이름에 이유가 있었다.
가이드 문서도 있었다. A4 2장.
- 타겟 연령층: 25-35세 여성
- 목적: 프로모션 인지도
- 컬러 근거: 브랜드 가이드 메인 컬러 활용
- 여백 기준: 모바일 가독성 고려 최소 32px
- 폰트 선택: 긴 문장 가독성 최우선
모든 게 이유였다. ‘예쁘다’가 아니었다.

바꾼 것
그다음 프로젝트. 배너 작업이 들어왔다.
시안 만들기 전에 A4 한 장 썼다.
디자인 결정 근거
- 타겟: 30대 직장인 남성
- 목적: 신규 서비스 인지
- 톤앤매너: 신뢰감, 전문성
- 컬러 방향: 차분한 블루 계열 (안정감)
- 레이아웃: 좌측 텍스트, 우측 비주얼 (시선 흐름)
- 여백: 답답하지 않게 최소 48px
- 폰트: 고딕 계열 (가독성)
한 시간 걸렸다. 근데 시안은 30분 만에 나왔다.
방향이 정해지니까 빨랐다. ‘이게 예쁜가?’ 고민이 없었다. ‘이게 맞나?’ 확신이 있었다.
선배에게 보여주는 시간
떨렸다. 근데 지난주랑 다른 떨림이었다.
“주니야, 시안 볼까?” “네.”
선배가 봤다. “음.”
이번엔 30초가 안 무서웠다.
“여기 여백은 왜 이렇게 했어?” “타겟이 모바일로 많이 볼 것 같아서요.” “손가락으로 누르기 편하게 48px로 잡았어요.”
“오, 그렇구나. 컬러는?” “신뢰감 주려고 브랜드 메인 블루 썼고요.” “채도는 낮춰서 부담 안 되게 했어요.”
“폰트는요?” “정보 전달이 중요해서 고딕으로요.” “헤드라인이랑 본문 위계 확실하게 나눴어요.”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이유가 명확하네.”
가슴이 뛰었다. 울었던 화장실 생각났다. 일주일 전이랑 다른 나.
클라이언트 미팅
2주 뒤. 클라이언트 미팅에 따라갔다.
선배가 시안을 보여줬다. 내 시안이었다.
클라이언트가 물었다. “이 컬러 좀 밝게 하면 안 될까요?”
선배가 나를 봤다. “주니야, 설명해 줄래?”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근데 말이 나왔다.
“타겟층이 30대 직장인이라서요.” “너무 밝으면 가벼워 보일 수 있어요.” “신뢰감이 중요한 서비스라서 이 톤으로 제안드렸습니다.”
클라이언트가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이해했어요.”
미팅 끝나고 선배가 말했다. “잘했어. 많이 늘었네.”
화장실 가서 또 울었다. 이번엔 다른 이유로.
지금의 나
요즘은 시안 만들기 전에 쓴다. 왜 이걸 하는지. 누구를 위한 건지. 뭘 전달하려는 건지.
3줄이면 된다. 그 3줄이 있으면 모든 게 달라진다.
여백도 ‘왜 이 크기’가 있다. 컬러도 ‘왜 이 색’이 있다. 폰트도 ‘왜 이 서체’가 있다.
감이 아니다. 이유다.
레퍼런스 보는 방법도 바뀌었다. 예전엔 ‘예쁘다’ 저장. 지금은 ‘왜 예쁜지’ 분석.
- 이 레이아웃은 시선을 어떻게 유도하나
- 이 컬러 조합은 왜 조화로운가
- 이 여백은 어떤 느낌을 주나
저장할 때 메모를 단다. “대각선 구도로 시선 유도” “보색 대비로 강조점 생성” “넓은 여백으로 프리미엄 느낌”
3개월 전 나는 몰랐다. 디자인은 예쁜 게 아니라 이유라는 걸.
후배가 생겼다
며칠 전. 신입이 들어왔다.
내가 2년 전 나다. 눈 초롱초롱하고 떨린다.
시안 보여주러 왔다. “선배님, 확인 부탁드려요.”
봤다. “음.”
“여기 여백은 왜 이렇게 했어?” 후배가 말했다. “그게… 그냥 예뻐 보여서요.”
웃었다. 나였다.
“괜찮아. 나도 그랬어.” “근데 이거 하나만 물어볼게.” “이 디자인으로 뭘 전달하고 싶어?”
후배가 생각했다. “잘 모르겠어요.”
“그럼 거기서부터 시작하자.” “예쁜 건 그다음이야.”
A4 용지 한 장 줬다. 디자인 결정 근거 빈 양식.
“이거 채워보고 다시 와.” “30분 걸릴 거야.” “근데 시안은 10분 만에 나올 거야.”
후배가 자리로 돌아갔다. 나도 저랬지. ‘왜 이렇게 했어?‘에 대답 못 했지.
그때 선배가 준 건 답이 아니었다. 질문이었다.
‘왜?‘라는 질문. 이게 날 디자이너로 만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