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 Dec, 2025
이 길이 맞나 싶은데 다른 걸 할 줄이 없다
오늘도 이력서 열어봤다새벽 2시에 사람인 켜놓고 있었다. '경력직 디자이너 모집'이라는 공고들. 자격요건 보다가 껐다. 3년 이상. 포트폴리오 필수. 나는 2년. 포트폴리오는 있는데 보여주기 창피한. 이런 밤이 한 달에 두세 번씩 온다. 선배한테 '이건 좀...'이라는 말 들었을 때. 팀장님이 한숨 쉬실 때. 디자인 파일 열어서 한 시간 째 커서만 깜빡일 때.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나 이거 아닌가 보다.'부트캠프 동기 단톡방에 올라온 글. "취업 준비하면서 UX 라이터 쪽도 보고 있어요." 좋아요 5개. 댓글은 없다. 나도 생각해본 적 있다. 전직. 마케터도 봤고. 기획자도 봤고. 유튜버 채용 공고도 클릭해봤다. '디자인 할 줄 아는 사람 우대'라고 써있어서. 근데 지원서는 안 썼다. 2년이 아까워서. 투자한 시간들 디자인 배운다고 부트캠프 다녔다. 6개월. 600만원. 부모님이 내주셨다. "주니야, 네가 하고 싶은 거 해." 그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취준 기간 8개월. 포트폴리오 10번 갈아엎었다. 면접 15곳. 떨어진 곳 14곳. 붙은 곳이 지금 회사다. 입사하고 2년. 선배들한테 까이면서 배운 것들. 그리드 시스템. 컴포넌트 정리법. 피드백 받는 법. 아직도 부족하지만 0에서는 왔다. 이걸 다 버리고 다른 걸 시작한다? 또 신입부터? 또 면접? 또 600만원? 계산기 두드려봤다. 2년 월급 모은 거. 1500만원. 부트캠프비 600만원. 취준 기간 생활비 300만원. 총 2400만원. 이게 매몰비용인지 투자인지 모르겠다. 다른 선택지는 뭔데가끔 친구들 만난다. 대학 동기들. 다들 다른 일 한다. 은행 다니는 애는 말했다. "주니야, 디자이너 되게 좋아 보이는데? 크리에이티브하고." 웃으면서 "응, 좋아"라고 했다. 마케팅하는 애는 물었다. "연봉은 좀 오르니?" "조금씩은." 거짓말이다. 작년에 3.5프로 올랐다. 프리랜서 하는 애가 제일 솔직했다. "나도 매일 때려치울까 생각해. 근데 다른 거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그 말이 제일 찔렸다. 나도 그렇다. 디자인 빼면 뭐가 있나. 포토샵? 피그마? 어도비 일러스트? 이거 들고 뭘 하지. 영어도 토익 700점대. 코딩은 HTML 조금. 글쓰기도 블로그 일기 수준. 결국 디자인밖에 없다. 그게 제일 무섭다. 선배의 한마디 지난주 회식 자리. 선배가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니야, 나도 3년 차까지 매일 때려치울까 생각했어." "네?" "근데 5년 차 되니까 좀 보이더라. 뭘 모르는지가." 그 말이 위로가 됐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3년 더 버텨야 한다'는 협박인지. 그래도 물어봤다. "그럼 선배님은 지금 괜찮으세요?" "괜찮진 않아. 근데 이게 내 일이긴 해." 집 가는 길에 그 말 곱씹었다. '이게 내 일이긴 해.'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언제쯤. 포트폴리오 다시 열어봤다 주말에 1년 전 포트폴리오 파일 찾았다. 취준할 때 만든 거. 지금 보니까 민망하다. 레이아웃도 들쑥날쑥. 폰트도 왜 저렇게 썼지. 그래도 이걸로 붙었다. 지금 다시 만든다면? 확실히 낫게 만들 것 같다. 2년 동안 배운 게 있긴 하다. 어제 작업한 배너 다시 봤다. 선배한테 5번 피드백 받고 통과된 거. 1년 전 나는 이거 못 만들었을 거다. 성장은 하고 있는 건가. 느리지만. 사람인 북마크 폴더 열어봤다. '이직 고려' 폴더. 공고 23개. 하나도 안 지워졌다. 클릭했다가 껐다. 또 내일 보자. 그래도 아침은 온다 출근길 지하철. 가방에서 태블릿 꺼냈다. 핀터레스트 켜서 레퍼런스 저장한다. 좋은 디자인 보면 그래도 기분이 좋다. '나도 이렇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 이게 아직 있다는 게 다행인가. 회사 도착. 9시 3분. 자리 앉아서 피그마 켰다. 어제 못 끝낸 작업 이어서 한다. 팀장님이 지나가면서 말했다. "주니야, 어제 배너 괜찮던데.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이럴 때는 생각한다. '오늘은 버틸 만하네.' 그렇게 하루가 또 간다. 때려치울까 고민하면서도. 내일도 출근할 거면서.이 길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근데 지금 당장 다른 길도 없다. 그래서 오늘도 피그마를 켠다.
- 04 Dec, 2025
선배 파일을 허락 없이 열어본 내 불안감
선배 파일을 허락 없이 열어본 내 불안감 그 파일을 열었다 금요일 오후 5시. 선배가 조퇴했다. "주니 씨, 먼저 갈게요. 수고하세요." "네, 편히 들어가세요." 30분 후, 나는 선배 컴퓨터 앞에 섰다. 아니, 정확히는 공용 서버 폴더였다. 선배 컴퓨터가 아니라 회사 서버. 누구나 볼 수 있는 곳. 그래도 심장이 뛰었다. 폴더명: 'OOO 메인배너_최종_0215' 클릭했다. 포토샵 파일이 열렸다. 레이어가 142개였다. 내 파일은 보통 30개 정도인데. "와..." 첫 반응은 감탄이었다. 두 번째 반응은 죄책감이었다.배우려고 한 건데 선배는 항상 파일 정리가 깔끔했다. 피드백 회의 때마다 느꼈다. "여기 이 요소는 이렇게 수정하면 돼요." 클릭 한 번에 레이어가 찾아진다. 나는 레이어를 찾다가 회의 시간을 잡아먹는다. "주니 씨, 레이어 정리 좀 해요. 나중에 본인도 못 찾아요." "네... 죄송합니다." 그래서 보고 싶었다. 선배가 어떻게 정리하는지. 그룹을 어떻게 나누는지. 이름을 어떻게 붙이는지. 학습이다. 학습. 나쁜 의도가 아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레이어를 하나씩 열어봤다. '상단_헤더_그룹' '중단_메인카피_수정본2' '하단_CTA버튼_최종' 규칙이 있었다. 위치-역할-버전. 내 레이어명은 '레이어1', '사각형2', '텍스트 복사본3' 이런 식이었다. 공책에 적었다. 선배 레이어명 규칙. 들킬까 봐 무서웠다 15분쯤 지났을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멈췄다. 급하게 파일을 닫았다. 저장하시겠습니까? 아니오. 마우스 커서가 떨렸다. 내 자리로 뛰어갔다. 의자에 앉자마자 모니터를 응시했다. 피그마를 열어뒀다. 일하는 척. 발소리는 화장실로 향했다. 다른 팀 사람이었다. "휴..." 식은땀이 났다. 등이 축축했다. 뭐가 무서운 거지? 공용 서버잖아. 누구나 볼 수 있잖아. 그런데 왜 도둑처럼 행동했지?다음 날 선배를 못 봤다 월요일 아침. 출근했다. 선배가 "주니 씨, 주말 잘 보냈어요?" 물었다. "네, 잘 보냈어요." 평소와 같았다. 그런데 내가 이상했다. 선배 얼굴을 제대로 못 봤다. 눈을 마주치면 들킬 것 같았다. 뭘 들키는데? 아무것도 안 했는데? "주니 씨, 이번 작업은 레이어 정리 잘 해봐요."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크게 했다. 목소리에 떨림이 있었다. 그날 작업하면서 선배 레이어 규칙을 써봤다. '상단_로고_그룹', '중단_타이틀_ver1'. 신기하게 찾기가 쉬웠다. 수정할 때도 빨랐다. "오, 주니 씨 레이어 정리 많이 좋아졌네요." 선배가 칭찬했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당신 파일 봤다고 말해야 하나? "감사합니다. 더 잘하겠습니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했다. 다른 파일도 열어봤다 그 후로 습관이 됐다. 선배 조퇴하는 날, 외근 가는 날, 연차 쓰는 날. 서버 폴더를 열었다. 처음엔 레이어 구조만 봤다. 나중엔 색상 팔레트를 봤다. 어떤 폰트를 쓰는지, 자간을 얼마나 주는지, 여백을 어떻게 조절하는지. 공책이 채워졌다. '선배 작업 노트'. 집에 숨겨뒀다. 실력은 늘었다. 피드백 받는 횟수가 줄었다. 팀장님이 "주니 씨, 요즘 성장 빠르네요" 했다. 기뻤다. 동시에 찝찝했다. 이건 내 실력인가? 선배를 훔쳐본 결과인가?선배한테 들켰다 지난주 목요일이었다. "주니 씨, 잠깐 얘기할까요?" 선배가 회의실로 불렀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네, 네..." 회의실 문을 닫았다. 둘만 남았다. "혹시... 제 작업 파일 본 적 있어요?" 끝났다. 들켰다. "저, 저는..." 변명이 안 나왔다. 손이 떨렸다. "아니, 화내려는 거 아니에요." 선배가 웃었다. "요즘 주니 씨 레이어 구조가 제 스타일이랑 똑같더라고요. 색상 조합도 비슷하고. 그래서 혹시 했는데." "죄송합니다. 배우고 싶어서... 그냥..." "아니, 좋은 거예요. 저도 신입 때 그랬거든요." "네?" "선배 파일 몰래 열어보고, 폰트 조합 따라하고. 그렇게 배웠어요. 다들 그래요." 선배가 말을 이었다. "근데 다음부턴 물어봐요. 같이 보면서 설명해줄게요. 그게 더 빨라요." 눈물이 날 뻔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주니 씨, 요즘 진짜 잘하고 있어요. 스스로 찾아서 배우는 거, 쉽지 않은데." 죄책감의 정체 그날 저녁, 집에 와서 생각했다. 왜 그렇게 불안했을까. 왜 도둑질하는 기분이었을까. 결론은 이거였다. 나는 내가 부족하다고 느꼈던 거다. 당당하게 물어볼 만큼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고. 선배 시간을 뺏을 자격이 없다고. 그래서 몰래 봤던 거다. 근데 선배는 당연하다고 했다. 신입은 원래 그렇게 배운다고. 내가 나를 너무 몰아세웠다. 배우고 싶어서 찾아본 건데. 성장하고 싶어서 노력한 건데. 그걸 죄책감으로 느낄 필요가 있었나. 지금은 선배한테 물어본다. "이 부분 어떻게 하신 거예요?" "파일 같이 볼 수 있을까요?" 선배는 친절하게 알려준다. 내가 몰래 본 것보다 훨씬 많은 걸 가르쳐준다. 그리고 깨달았다. 죄책감은 나의 성장을 가로막았다. 당당하게 배우는 게 더 빠르다. 신입의 권리다, 질문하는 건. 이제는 서버 폴더를 여전히 본다. 하지만 몰래 보지 않는다. "선배님, 이 파일 구조 참고해도 될까요?" "네, 당연하죠. 같이 볼까요?" 이게 정답이었다. 배우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 모르는 걸 숨기는 게 부끄러운 거다. 요즘 신입이 들어왔다. 나보다 6개월 늦게. 어제 그 신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님, 레이어 정리 어떻게 하세요?" 나는 내 파일을 열어서 보여줬다. "이렇게 하면 돼요. 필요하면 제 파일 참고해도 돼요." 그 신입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 얼굴을 보면서 알았다. 내가 받은 걸 돌려주는 거구나.죄책감 대신 질문을 배웠다. 그게 진짜 성장이었다.
- 03 Dec, 2025
무드보드는 뭘 모아야 하는 걸까요?
무드보드는 뭘 모아야 하는 걸까요? "주니 씨, 이번 프로젝트 무드보드 좀 만들어봐요." 선배가 웃으면서 말했다. 가볍게.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책상으로 돌아왔다. 손이 떨렸다. 무드보드. 들어는 봤다. 만들어는 본 적 없다. 일단 Pinterest부터 켰다 뭘 모아야 하지. 일단 프로젝트 키워드를 검색했다. "미니멀 카페 인테리어". 나오는 건 다 예뻤다. 전부 저장했다. 30분 후, 핀 보드에 이미지가 47개 쌓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전부 다른 느낌이었다. 일본풍도 있고, 북유럽풍도 있고, 빈티지도 있고. "이거... 맞나?" 선배한테 보여드렸다. "음... 방향성이 좀 없네요. 뭘 말하고 싶은 거예요?" 뭘 말하고 싶은 거냐고. 나는 몰랐다. 예쁜 걸 모았을 뿐이다.유튜브를 뒤졌다 "무드보드 만드는 법" 검색. 영상이 수십 개 나왔다. 다 봤다. 공통점이 있었다. "무드보드는 분위기를 담는 거예요." "컨셉을 시각화하는 작업이죠." 알겠어. 분위기. 컨셉. 그게 뭔데. 어떤 영상에서는 색만 모았다. 어떤 영상에서는 텍스처만 모았다. 어떤 영상에서는 레퍼런스 사이트만 캡처했다. 다들 다르게 한다. 정답이 없다는 게 더 무서웠다. 다시 처음부터 멍하니 앉아 있었다. 브리핑 문서를 다시 읽었다. "20대 여성 타겟, 혼자 와도 편한 공간,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 이 문장을 계속 읽었다. '혼자 와도 편한'이 눈에 들어왔다. 그럼 뭐가 필요하지. 혼자 있을 때 편한 건 뭐지. 나는 혼자 카페 갈 때 뭘 보지. 창가 자리. 작은 테이블. 개인 공간이 확보된 느낌. 그게 무드다. 그게 컨셉이다. 조금 감이 왔다.다시 모으기 시작했다 이번엔 달랐다. "창가 좌석" "1인 테이블" "독서하는 사람" 이런 키워드로 찾았다. 색도 생각했다. 차분한 느낌이면 채도 낮은 색. 베이지, 그레이, 밝은 우드톤. 텍스처도 골랐다. 따뜻한 느낌이면 패브릭. 리넨, 울, 니트 같은 거. 조명도 중요했다. 밝으면 너무 카페 같다. 은은한 조명. 따뜻한 빛. 30개를 모았다. 이번엔 다 비슷한 느낌이었다. 선배한테 보여드렸다. "오, 이번엔 괜찮네요. 혼자 와도 편한 느낌 나요." 그 말 듣고 화장실 갔다. 울지는 않았다. 웃었다. 무드보드는 방향성이다 그 뒤로 깨달았다. 무드보드는 예쁜 거 모으는 게 아니다. 방향성을 정하는 작업이다. "우리는 이쪽으로 갈 거예요"를 보여주는 거다. 색 하나, 텍스처 하나, 레퍼런스 하나. 전부 같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 "20대 여성이 혼자 와도 편한 공간"이라는 이야기를. 그래서 지금은 무드보드 만들 때 질문한다. "이 프로젝트는 뭘 말하고 싶은 거지?" 그 답이 나오면, 모을 게 보인다.아직도 어렵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어렵다. 무드보드 만들 때마다 헤맨다. "이 이미지가 맞나?" 계속 의심한다. "이거 너무 뻔한 거 아냐?" 고민한다. 선배는 30분 만에 만든다. 나는 3시간 걸린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2개월 전엔 뭘 모아야 할지도 몰랐으니까. 지금은 적어도 "왜 이걸 모았는지"는 말할 수 있다. "이 이미지는 이런 느낌을 주려고 넣었어요." 완벽하진 않아도, 이유는 있다. 그게 성장인 거다. 무드보드 만들 때 내가 하는 것 요즘은 이렇게 한다. 1. 브리핑 읽고 키워드 뽑기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느낌을 형용사로 정리 "차분한", "따뜻한", "고급스러운" 이런 식으로2. 그 느낌이 나는 것들 떠올리기실제 경험 기반으로 "차분하다"면 내가 차분함을 느꼈던 공간 생각3. 카테고리별로 모으기색 5개 텍스처 5개 레퍼런스 10개 타이포 3개4. 전체 보면서 빼기너무 튀는 거 삭제 방향 다른 거 삭제 20개 안팎으로 정리5. 왜 이걸 골랐는지 메모나중에 설명할 때 필요 선배가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게시간은 오래 걸린다. 하지만 이 과정 거치면, 헤매는 시간이 줄어든다. 무드보드가 없으면 요즘은 안다. 무드보드 없이 작업하면 어떻게 되는지. 방향을 잃는다. "이것도 괜찮고, 저것도 괜찮고" 계속 흔들린다. 시안 5개를 만든다. 전부 다른 느낌이다. 통일성이 없다. 선배한테 피드백 받으면 전부 엎는다. "컨셉이 뭐예요?" 질문에 대답 못 한다. 무드보드가 있으면 다르다. "우리는 이 방향으로 가기로 했잖아요" 말할 수 있다. 흔들려도 돌아올 곳이 있다. 기준이 있다. 무드보드는 나침반이다. 길 잃지 않게 해주는.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주에 선배가 말했다. "주니 씨, 무드보드 실력 늘었어요." "처음엔 예쁜 것만 모았는데, 이제는 의도가 보여요." 그 말 듣고 기분이 좋았다. 3개월 전에 화장실에서 울었던 게 생각났다. "무드보드는 연습이에요. 많이 만들어보는 수밖에 없어요." 선배 말이 맞았다. 처음엔 뭘 모아야 할지 몰랐지만, 지금은 조금 안다. 완벽하진 않아도, 방향은 안다. 그게 전부다. 지금 막막한 사람에게 만약 지금 무드보드 앞에서 막막하다면. 일단 브리핑을 다시 읽어라. 키워드를 찾아라. 형용사를 찾아라. "이 프로젝트는 뭘 말하고 싶은 거지?" 그 질문에 답하면, 모을 게 보인다. 예쁜 거 모으지 마라. 방향 맞는 거 모아라. 5개만 모아도 괜찮다. 그 5개가 같은 이야기를 하면 된다. 처음엔 3시간 걸려도 괜찮다. 나중엔 1시간으로 줄어든다. 무드보드는 감이 아니다. 연습이다. 훈련이다. 많이 만들어봐라. 실패해봐라. 엎어봐라.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안다. "아, 이게 무드보드구나." 오늘도 무드보드 오늘도 새 프로젝트가 들어왔다. "무드보드 만들어봐요." 이제는 덜 떨린다. 무서워도, 뭘 해야 할지는 안다. 브리핑 읽고, 키워드 뽑고, 느낌 떠올리고, 모으고, 정리한다. 3시간 걸릴 거다. 그래도 괜찮다. 2개월 전엔 방향도 몰랐으니까. 지금은 적어도 길을 안다. 완벽하지 않아도, 가고 있다. 그게 성장이다.무드보드는 예쁜 걸 모으는 게 아니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걸 모으는 거다.
- 03 Dec, 2025
피드백 받은 후 수정하는 데 3시간이 걸리는 이유
오늘도 3시간 선배한테 피드백 받았다. 슬랙 메시지 3줄. "전체적인 톤이 좀 더 밝았으면 좋겠어요" "여백 조정 부탁드려요" "내일 오전까지 수정본 올려주세요" 읽었다. 다시 읽었다. 또 읽었다. 뭘 고치라는 건지 모르겠다.톤이 밝다는 게 "전체적인 톤이 좀 더 밝았으면" 이게 색을 밝게 하라는 건가. 아니면 분위기를 밝게 하라는 건가. 명도를 올리라는 건가. 채도를 높이라는 건가. 파일을 열었다. 일단 색부터 건드려봤다. 배경색 #F5F5F5에서 #FFFFFF로. 너무 하얗다. 다시 #F8F8F8로. 별 차이 없다. 텍스트 색도 #333333에서 #666666으로. 아니다, 더 어두워 보인다. 원복. 30분 지났다. 이미지 색감을 건드려봤다. 포토샵 켜서 Curves 조정. 밝아졌다. 근데 이게 맞나. 이것도 아닌 것 같다. 다시 원본으로. 1시간 지났다. 선배가 원한 게 이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톤'이 색상 톤이 아니라 '느낌'을 말하는 거였을 수도. 그럼 뭘 고쳐야 하는데.여백 조정 "여백 조정 부탁드려요" 어디 여백. 위쪽인가. 아래쪽인가. 좌우인가. 전체인가. 일단 다 늘려봤다. padding 20px에서 30px로. 어색하다. 너무 넓다. 다시 25px로. 이것도 아니다. 상단만 줄여봤다. 40px에서 30px로. 답답해 보인다. 하단도 건드려봤다. 60px에서 80px로. 너무 텅 비었다. 각 섹션 사이 간격도 조정했다. 50px, 60px, 70px. 다 어색하다. 원본이 뭐였는지 까먹었다. Ctrl+Z 10번 눌렀다. 1시간 반 지났다. 결국 원본이랑 거의 똑같은 상태로 돌아왔다. 여백을 5px 늘렸다 줄였다 한 게 전부다. 이게 맞는 건가. 질문하면 되는데 "선배님, 어느 부분 여백 말씀하신 건가요?" 이 한 마디면 된다. 30초면 답 온다. 근데 못 물어본다. 이런 것도 모르나 싶을까 봐. 이미 설명했는데 또 묻는다고 생각할까 봐. 귀찮게 한다고 생각할까 봐. 선배는 바쁘다. 자기 일도 있다. 내가 물어보면 손 멈추고 답해줘야 한다. 미안하다. 그래서 혼자 3시간 동안 이것저것 만져본다.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정답일 것 같은 걸 찾는다. 2시간 반 지났다.결국 올린 파일 저장했다. "최종_수정_1204_v3.fig" 슬랙에 올렸다. "수정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메시지 보내기 전에 7번 읽었다. 마침표 위치도 고민했다. 이모지 넣을까 말까 고민했다. 결국 안 넣었다. 전송. 3시간 지났다. 선배 답장 왔다. "수고했어요. 근데 제가 말한 건 메인 배너 여백이었어요. 전체 말고요." 메인 배너. 전체가 아니라 메인 배너. 파일 다시 열었다. 메인 배너 여백 조정. 10분 걸렸다. 다음에도 똑같다 이게 처음이 아니다. 다음에도 똑같을 것이다. 피드백 받으면 일단 멍하다. 뭘 고치라는 건지 정확히 모르겠다. 물어보면 된다는 걸 안다. 근데 못 물어본다. 혼자 이것저것 시도한다. 시간만 간다. 결국 틀렸다는 걸 안다. 다시 한다. 효율이 떨어진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못 고친다. 왜냐면 물어보는 게 더 무섭다. "이것도 모르면서 디자이너 하냐"는 소리 들을까 봐. 실제로는 아무도 그렇게 말 안 하는데, 내가 혼자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3시간이 걸린다.물어보는 게 3시간보다 빠르다는 걸, 사실 알고 있다.
- 03 Dec, 2025
'감이 좀 없네'라는 말을 화장실에서 들었을 때
'감이 좀 없네' 그 순간 복도에서 들렸다. "주니 시안... 음, 감이 좀 없네." 팀장님 목소리였다. 내 자리에서 5미터 떨어진 회의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나는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손이 멈췄다.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냥 다시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선배 목소리.심장이 쿵쿵거렸다. 얼굴이 뜨거웠다. 그 시안. 사흘 밤을 새운 거였다. 레퍼런스 50개 모았다. 무드보드 3번 갈아엎었다. 컬러 조합만 20번 바꿨다. 월요일 아침 9시에 슬랙으로 올렸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멘션 달고. 읽음 표시는 10분 만에 떴다. 답장은 없었다. 화요일도 답 없음. 수요일 점심때 팀장님이 "주니 시안 회의 때 보자" 했다. 지금이 그 회의다. 나는 초대받지 못했다. 화장실 자리를 벗어났다. 걸었다. 복도, 계단, 화장실. 제일 안쪽 칸. 문 잠갔다. 변기 뚜껑 덮고 앉았다. 울지 않으려고 했다. 눈물이 났다. "감이 없다"는 게 뭔데. 뭘 어떻게 하면 감이 있는 건데. 레퍼런스 따라 했다고? 그러면 "참신하지 않다"고 했잖아. 내 스타일로 했다고? "브랜드랑 안 맞는다"고 했고.핸드폰 켰다. 슬랙 열었다. 내가 올린 시안 파일 다시 봤다. 뭐가 문제지. 여백? 폰트? 색? 레이아웃? 모르겠다. 전부 다 문제 같았다. 휴지로 눈 닦았다. 코 풀었다. 거울 봤다. 눈 빨갛다. 립밤 발랐다. 볼 두드렸다. 물 마셨다. 3시 47분. 자리 돌아가야 한다. 퇴근 후 6시 32분에 나왔다. 선배들보다 먼저는 못 나간다. 지하철 4호선. 신림역까지 40분. 서서 갔다. 핸드폰으로 '디자인 감각 키우는 법' 검색했다. 블로그 글 5개 읽었다. 다 똑같았다. "많이 보세요. 매일 연습하세요. 피드백 받으세요." 알아. 다 하고 있어. 근데 안 되니까 문제지. 집 도착. 7시 18분. 배고팠는데 밥 생각 안 났다. 침대에 누웠다. 천장 봤다. 남자친구한테 톡 왔다. "오늘 어땠어?" "그냥 그랬어." 보냈다. "힘들어? 전화할까?" "아니 괜찮아. 피곤해서 좀 쉴게." "응 푹 쉬어. 내일 보자."전화하면 울 것 같았다. 울면 설명해야 한다. 설명하면 더 초라해진다. '회사 그만둘까.' 생각했다. 진지하게. 근데 그만두고 뭐 해. 이것밖에 못 하는데. 유튜브 9시쯤 일어났다. 샤워했다. 편의점 가서 삼각김밥 샀다. 노트북 켰다. 유튜브 열었다. '디자인 감각'으로 검색. 영상 하나 클릭. "디자이너에게 감각이란 무엇인가 | 주니어 디자이너 필수 시청" 17분짜리. 다 봤다. "감각은 타고나는 게 아닙니다. 쌓이는 겁니다." 강사가 말했다. 유명한 사람. 수강생 후기 좋은. "좋은 디자인 100개 보면, 안 좋은 디자인이 보입니다. 1000개 보면, 왜 안 좋은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또 봤다. 메모했다.매일 레퍼런스 10개 저장 왜 좋은지 3줄 써보기 직접 따라 만들어보기"따라 만들기"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레퍼런스 모으기만 했다. 1000개 넘게 저장했다. 근데 한 번도 따라 만들어본 적 없다. 그날 밤 핀터레스트 켰다. 저장한 레퍼런스 중에 제일 좋아하는 거 하나 골랐다. 해외 브랜드 상세페이지. 미니멀한데 감각적. 여백 쓰는 게 예술. 피그마 켰다. 새 파일 만들었다. "따라하기_001" 스포이드로 색 따왔다. 폰트 찾았다. 레이아웃 재구성했다. 1시간 걸렸다. 완성했다. 나란히 놓고 봤다. 다르다. 많이 다르다. 원본은 숨 쉬는 것 같다. 내 건 답답하다. 왜지. 확대해서 봤다. 여백을 쟀다. 패딩, 마진, 라인 높이. 숫자가 달랐다. 미묘하게. 원본: 타이틀 아래 56px 여백. 내 거: 40px. 원본: 라인 높이 1.8. 내 거: 1.5. 8px 차이. 0.3 차이. 이게 차이를 만들었다. "감각은 디테일이구나." 혼자 중얼거렸다. 다음 날 출근했다. 9시 5분. 평소보다 일찍. 선배가 말 걸었다. "주니야, 어제 시안 말이야. 팀장님이..." "네. 들었어요. 복도에서." "아. 그래?" 선배가 민망한 표정. "미안. 문 닫을걸." "아니에요. 괜찮아요." "다시 해야 할 것 같은데. 내가 레퍼런스 몇 개 보내줄게." "감사합니다." 자리 앉았다. 슬랙 확인했다. 선배가 보낸 레퍼런스 3개. 하나씩 열어봤다. 저장했다. 여백 쟀다. 폰트 확인했다. 색상 스포이드 떴다. 점심시간. 혼자 먹었다. 핸드폰으로 어제 만든 따라하기 파일 봤다. 오후에 새 시안 시작했다. 레퍼런스 참고했다. 근데 숫자를 똑같이 맞췄다. 여백 56px. 라인 높이 1.8. 폰트 크기 48px. 5시쯤 완성했다. 팀장님한테 보냈다. "재시안 확인 부탁드립니다." 읽음. 30분 뒤 답장. "오 이번 건 괜찮네. 이 방향으로 가자." 심장이 또 쿵쾅거렸다. 근데 어제랑 다른 쿵쾅. 선배가 엄지 이모지 달았다. 나는 파일을 저장했다. "시안_최종_승인_v1" 그 후 '감이 없다'는 말. 아직도 생각난다. 근데 이제는 안다. 감이 없는 게 아니라 디테일이 없었던 거. 레퍼런스 1000개 모아도 소용없다. 하나를 제대로 뜯어봐야 한다. 매일 밤 30분. 따라 만들기 한다. 지금 43개째. 여전히 선배 시안이 더 좋다. 팀장님 피드백 받으면 떨린다. 근데 3개월 전 내 시안 보면 부끄럽다. 그게 성장이다. 감각은 하루아침에 안 생긴다. 매일 0.1%씩 쌓인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 그걸로 됐다.화장실에서 운 날, 나는 좀 더 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