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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 23 Dec, 2025
선배 앞에서 질문하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가
오전 10시 32분 슬랙 메시지 창을 켰다 껐다를 벌써 다섯 번째다. "선배님, 혹시 이 부분이..." 지웠다. "선배님, 바쁘신데 죄송한데요..." 이것도 지웠다. 그냥 혼자 해결하려고 구글링을 시작했다. 'figma component variant how to'. 'figma 컴포넌트 변형 방법'. 'figma 여러 상태 만들기'. 검색어를 한글로 바꿨다 영어로 바꿨다 반복한다. 유튜브 영상을 세 개 봤다. 다 아는 내용이다. 내가 모르는 건 저게 아닌데. 내 상황은 조금 다른데. 시계를 봤다. 10시 47분. 15분을 날렸다.선배 책상을 슬쩍 봤다. 헤드폰을 끼고 있다. 집중 모드다. 방해하면 안 된다는 걸 안다. 2년 동안 배웠다. 선배가 헤드폰 끼면 말 걸지 말 것. 회의 30분 전엔 말 걸지 말 것. 점심 직후엔 말 걸지 말 것. 퇴근 30분 전엔 절대 말 걸지 말 것. 그럼 언제 질문하냐고. 모르겠다. 나도. 질문 한 번 하는데 걸리는 시간 질문을 만든다. 10분. 질문이 바보 같은 질문인지 확인한다. 5분. 구글링으로 혼자 해결 시도한다. 15분. 실패한다. 다시 질문을 다듬는다. 5분. 선배 눈치를 본다. 3분. 슬랙 메시지를 쓴다. 7분. 지운다. 다시 쓴다. 5분. 보낸다. 총 50분. 답장은 "어 그거? 여기 이렇게 하면 돼요 ㅎㅎ" 10초.50분 동안 나는 뭘 한 걸까. 선배한테는 10초짜리 질문이었는데. 나한테는 50분짜리 고민이었는데. 이게 맞나 싶다. '혹시'라는 단어 내 질문은 항상 '혹시'로 시작한다. "혹시 이 부분이..." "혹시 시간 되실 때..." "혹시 바쁘지 않으시면..." '혹시'는 면죄부다. 질문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조심스럽게 던지는 신호탄이다. 선배는 '혹시' 안 붙인다. "이주니씨, 이 부분 어떻게 된 거예요?" "이주니씨, 이거 확인 부탁드려요." 단호하다. 깔끔하다. 자격이 있어 보인다. 나도 저렇게 말하고 싶다. 근데 안 나온다. 입 밖으로 나올 때쯤이면 자동으로 '혹시'가 붙어 있다. "혹시 선배님..." 습관이 됐다. 아니, 체질이 됐다. 질문 앞에 붙는 것들 미안함부터 시작한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만..." 왜 미안한지 모르겠다. 질문하는 게 잘못인가. 근데 미안하다. 선배 시간을 뺏는 것 같아서. 선배 집중을 끊는 것 같아서. 그다음은 고마움이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안 알려줬는데 벌써 감사하다고 한다. 미리 감사해야 알려줄 것 같아서. 그다음은 변명이다. "제가 찾아봤는데 잘 모르겠어서요..." 안 찾아본 것 같아서. 게으른 것 같아서. 무능한 것 같아서. 질문 하나에 붙는 게 너무 많다. 정작 질문은 한 줄인데. 앞뒤로 포장하는 게 세 줄이다.선배가 바쁠 때 제일 답답할 때다. 프로젝트 막바지다. 다들 바쁘다. 선배는 더 바쁘다. 나도 급하다. 이거 안 물어보면 진도가 안 나간다. 근데 못 물어본다. 책상 앞에 앉아서 선배 뒷모습만 본다. 언제 한가해지나. 언제 헤드폰 벗나. 점심시간을 기다린다. 같이 밥 먹으면서 슬쩍 물어볼까. 근데 점심시간에 일 얘기 하는 것도 눈치 보인다. 회의 끝나고 물어볼까. 근데 회의 끝나면 선배는 또 바빠진다. 퇴근 직전에 물어볼까. 그럼 선배 퇴근 늦어진다. 그건 더 못 한다. 결국 못 물어본다. 집에 와서 유튜브 강의를 본다. 답을 찾는다. 시간은 밤 11시. 다음 날 출근한다. 선배가 내 작업물을 본다. "이주니씨, 이 부분 왜 이렇게 했어요?" 어제 물어보려고 했다고 말 못 한다. "죄송합니다. 수정하겠습니다." 질문이 쌓이는 메모장 내 핸드폰 메모장에는 '질문 목록'이 있다.컴포넌트 variant 여러 개 동시에 바꾸는 법 auto layout 간격이 안 맞을 때 이미지 export 시 테두리 잘리는 문제 선배가 쓰는 폰트 조합 기준 무드보드 만들 때 이미지 개수적어둔다. 나중에 한꺼번에 물어보려고. 근데 '나중'이 안 온다. 질문은 계속 쌓인다. 20개. 30개. 어떤 건 스스로 해결한다. 어떤 건 이제 와서 물어보기 민망해진다. 어떤 건 뭘 모르는지도 까먹는다. 메모장만 길어진다. 선배는 어떻게 배웠을까 가끔 궁금하다. 선배도 주니어 시절이 있었을 텐데. 그때도 질문하기 어려웠을까. "선배님도 신입 때 질문 많이 하셨어요?" 용기 내서 물어봤다. 점심 먹으면서. "많이 했죠. 모르는 거 그냥 다 물어봤어요." 그냥 다. 나는 왜 '그냥' 못 물어볼까. "주니씨도 많이 물어봐요. 모르는 게 당연한 거잖아요." 맞다. 당연하다. 머리로는 안다. 근데 가슴이 모른다. 손가락이 모른다. 슬랙 메시지 창 앞에서 손가락이 멈춘다. 혼자 해결했을 때 가끔 혼자 해결한다. 2시간 동안 구글링하고 유튜브 보고 이것저것 시도해서 답을 찾는다. 뿌듯하다. 나도 할 수 있구나. 근데 선배한테 물어봤으면 5분이었을 걸. 2시간을 썼다. 이게 성장인가. 아니면 비효율인가.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다음에 또 비슷한 문제가 생기면 또 2시간 쓸 것 같다는 거다. 또 혼자 끙끙댈 것 같다는 거다. 또 선배 눈치 볼 것 같다는 거다. 질문했을 때 제일 무서운 반응 "그건 저번에 말씀드렸는데요." 심장이 멈춘다. "아... 죄송합니다..." 기억이 안 난다. 언제 들었지. 왜 기억이 안 나지. 메모를 했어야 했나. 녹음을 했어야 했나. 또 물어보면 안 된다. 다음부터는 절대 못 물어본다. 집에 와서 그날 나눴던 대화를 곱씹는다. 아. 그때 그 말이 이 말이었구나. 그때 제대로 이해 못 했으면 바로 다시 물어볼 걸. 근데 그때도 못 물어봤다. '네 알겠습니다' 하고 넘어갔다. 다른 팀 디자이너 선배한테는 신기하게 다른 팀 선배한테는 질문이 편하다. 같은 회사인데. 일주일에 한 번 마주치는 디자이너 선배. "선배님, 혹시 이거 여쭤봐도 될까요?" "어 그럼요." 편하다. 부담 없다. 같은 질문인데 우리 팀 선배한테 하면 심장이 쫄깃해지는데. 다른 팀 선배한테 하면 괜찮다. 왜 그럴까. 매일 보는 사이라서 그런가. 내 무능함을 매일 들키는 게 싫어서. 평가하는 사람이라서 그런가. 우리 팀 선배는 내 연말 평가에 의견을 낸다.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아서 그런가. 다 맞는 것 같다. 팀장님 질문은 더 무섭다 선배한테 질문하기 어려운데. 팀장님한테는 더 어렵다. "팀장님, 혹시..." 말을 꺼내면 사무실 분위기가 바뀌는 것 같다. 다들 이쪽을 보는 것 같다. 질문 수준이 낮으면 안 될 것 같다. 너무 디테일한 질문도 안 될 것 같다. 적당히 중요한데 적당히 전문적인 질문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런 질문을 만들기가 어렵다. 그래서 안 한다. 팀장님한테는 거의 안 물어본다. 회의 시간에 팀장님이 "질문 있어요?" 물어본다. 없습니다. 있는데 없다고 한다. 슬랙 메시지 vs 직접 질문 슬랙이 편하다. 얼굴 안 봐도 된다. 선배 표정 안 봐도 된다. 문장을 다듬을 수 있다. 근데 슬랙도 어렵다. 보냈는데 답이 없으면. 확인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으면. '읽음' 표시가 떴는데 답이 없으면. 기다린다. 10분. 30분. 1시간. 혹시 내 질문이 이상했나. 혹시 바빠서 나중에 답하려는 건가. 다시 메시지를 보낼까. 근데 재촉하는 것 같아서. 그냥 기다린다. 직접 물어보는 건 더 어렵다. "저기... 선배님..." 목소리가 떨린다. 선배가 고개를 든다. "혹시... 아 아니에요. 나중에 시간 되실 때 여쭤볼게요." "지금 괜찮은데요?" "아 그럼... 저기..." 말이 꼬인다. 준비한 질문이 입 밖으로 안 나온다. "천천히 말해봐요." 천천히 말해도 꼬인다. 질문 잘하는 신입이 부럽다 같은 시기에 들어온 개발팀 신입이 있다. 걔는 질문을 잘한다. "이 부분 이해가 안 가는데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이 방법이랑 저 방법 중에 뭐가 나을까요?" "제 생각은 이런데 맞는지 확인 부탁드려요." 당당하다. 자연스럽다. 선배들도 잘 알려준다. 친절하게. 나도 저렇게 하고 싶다. 근데 안 된다. 디자인이랑 개발이 다른가. 질문하는 문화가 다른가. 아니면 나만 유난히 못 하는 건가. 혼자 끙끙대는 시간 오늘도 혼자 끙끙댔다. 모달 디자인을 하는데 버튼 배치가 애매했다. 왼쪽에 둘까 오른쪽에 둘까. 취소 버튼이 먼저 올까 확인 버튼이 먼저 올까. 구글에서 'modal button placement'를 검색했다. 영어로 된 아티클을 다섯 개 읽었다. Material Design 가이드를 봤다. iOS 가이드를 봤다. 답은 '경우에 따라 다르다'였다. 우리 경우는 뭔데. 선배한테 물어보면 3초 만에 답 나올 것 같은데. 근데 못 물어본다. 1시간을 썼다. 결국 감으로 정했다. 오른쪽에 확인 버튼. 왼쪽에 취소. 내일 선배가 보면 뭐라고 할까. "이주니씨, 이거 왜 이렇게 배치했어요? 우리는 반대로 하기로 했잖아요." 그럴 것 같다. 그럼 또 고친다. "네 알겠습니다." 질문을 안 하면 질문을 안 하면 혼자 헤맨다. 방향을 잘못 잡는다. 시간을 낭비한다. 결과물이 이상해진다. 그걸 알면서도 질문을 못 한다. 악순환이다. 질문 안 함 → 실수함 → 혼남 → 더 위축됨 → 질문 더 못 함 → 실수 더 많아짐 고리를 끊어야 하는데. 첫 단추가 '질문하기'인데. 그게 제일 어렵다. 선배의 한마디 지난주에 선배가 그랬다. "주니씨, 모르는 거 있으면 바로바로 물어봐요. 나중에 고치는 게 더 힘들어요." 안다. 머리로는 안다. "네... 알겠습니다..." 근데 다음 날도 못 물어봤다. 선배는 이해 못 할 것 같다. 왜 질문하기가 이렇게 어려운지. 나도 나를 이해 못 한다.질문 버튼을 누르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 오늘도 슬랙 메시지를 열 번 고쳐 썼다. 보내지는 못했지만.
- 16 Dec, 2025
선배 디자인 옆에 내 디자인을 놓았을 때
같은 파일명, 다른 세계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팀장님이 슬랙을 쳤다. "주니, 현진 씨랑 같은 컨셉으로 각자 시안 한 번씩 뽑아봐. 금요일 오전까지." 같은 브리핑. 같은 레퍼런스. 같은 마감. 현진 선배 경력은 5년. 나는 2년 3개월.목요일 밤 11시에 파일을 저장했다. "최종_배너_주니_1124_v3.fig" 금요일 아침, 선배 파일이 올라와 있었다. "배너_현진_최종.fig" 버전 넘버도 없다. 한 번에 끝냈다는 뜻이다. 20분의 침묵 회의실에 모니터 두 대를 켰다. 왼쪽에 선배 시안. 오른쪽에 내 시안. 같은 브리핑이 맞나 싶었다. 선배 건 보는 순간 알았다. "아, 이거다." 내 건 보는 순간도 알았다. "아, 이게 아닌데." 팀장님이 20분 동안 두 개를 번갈아 봤다. 나는 책상 모서리를 손톱으로 긁었다. "주니 거, 요소는 다 들어갔는데..." 들어갔는데. 이 말 뒤에는 항상 문제가 온다. "현진 거는 한눈에 들어오네. 이걸로 가자." 회의가 끝났다. 선배는 자리로 돌아가서 다른 작업을 시작했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물을 마셨다. 10분 동안.파일을 열었다 점심시간에 혼자 남아서 두 파일을 나란히 띄웠다. 선배 파일부터. 레이어 이름이 정갈하다. "bg_gradient", "cta_button", "text_headline". 내 파일. "사각형 1 복사본 3", "그룹 해제 23", "레이어 189". 이건 정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선배 시안은 여백이 숨을 쉰다. 내 시안은 여백이 불안하다. 뭔가 더 채워야 할 것 같다. 선배 건 폰트가 두 개다. 본문, 강조. 끝. 내 건 폰트가 네 개다. 각각 다 이유가 있었는데 지금 보니 산만하다. 선배 건 색이 세 개다. 메인, 서브, 포인트. 내 건 색이... 스포이트로 찍어봤다. 일곱 개다. "통일성"이라는 게 이런 건가. 대체 어떻게 이렇게 선택을 적게 하는데 더 풍부해 보이는 거지. 구조를 뜯어봤다 선배 시안을 레이어별로 껐다 켰다 해봤다. 타이틀 끄니까 CTA 버튼이 자연스럽게 시선을 끈다. 버튼 끄니까 이미지가 말을 한다. 이미지 끄니까 배경 그라데이션이 공간을 잡는다. 뭘 빼도 무너지지 않는다. 내 시안은. 타이틀 끄니까 허전하다. 버튼 끄니까 어디 봐야 할지 모르겠다. 이미지 끄니까 텅 빈다. 각 요소가 서로를 안 믿는다. 혼자 목소리를 높인다. 30분 동안 레이어를 켰다 껐다 반복했다. 답은 여기 있는데. 내가 못 읽는 거다.센스냐, 경험이냐 퇴근길 지하철에서 현진 선배한테 슬랙을 보냈다. "선배, 제 시안이랑 선배 시안 차이가... 어디서 나는 것 같으세요?" 10분 뒤 답이 왔다. "응 나도 2년차 때 너랑 똑같았어. 요소 다 넣으려고 안간힘 썼지." "그럼 언제부터 달라진 거예요?" "음... 빼도 된다는 걸 알았을 때?" "그게 언제였어요?" "300개쯤 만들고 나니까." 300개. 나 지금 몇 개 만들었지. 회사 들어와서 배너, 상세페이지, 팝업 합쳐서... 한 80개? 220개 남았다. 220개 더 만들면 나도 저렇게 될까. 아니면 220개 만들어도 센스가 없으면 소용없는 걸까. 집에 와서 노트에 적었다. "경력 5년 = 시안 몇 개?" 계산해봤다. 주 5일, 하루 1개씩만 쳐도 연 250개. 5년이면 1,250개. 나랑 1,170개 차이. 이게 "경험"의 물리적 거리구나. 못 보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주말에 현진 선배 시안을 프린트했다. 책상에 붙이고 따라 만들어봤다. 똑같이. 레이어 이름까지 똑같이. 폰트 사이즈, 자간, 행간, 컬러 코드 전부. 3시간 걸렸다. 완성하고 나니까 뭔가 보였다. 타이틀 크기가 생각보다 크다. 겁 없이 크다. 여백이 생각보다 넓다. 불안할 만큼 넓다. 컬러가 생각보다 절제돼 있다. 심심할 만큼. 근데 이게 더 시원하다. 더 읽힌다. 더... 프로페셔널하다. 그다음 내 시안을 선배 방식으로 고쳐봤다. 폰트 4개를 2개로. 색 7개를 3개로. 요소 12개를 8개로. 여백을 1.5배로. 저장하고 봤다. "어? 이게 더 낫잖아?" 근데 이걸 처음부터 못 한 거다. 빼는 게 무서웠다. 비어 보일까 봐. 못 만든 것처럼 보일까 봐. 디자인은 더하기가 아니었다 월요일 아침, 팀장님한테 메시지 보냈다. "지난 시안, 다시 한번 수정해봐도 될까요?" "응? 이미 현진 거로 진행 들어갔는데. 왜?" "제가 뭘 놓쳤는지 알 것 같아서요. 연습 삼아서라도." "그래, 한번 해봐." 화요일 오전에 수정본 올렸다. 팀장님이 30초 보더니 말했다. "오, 이게 금요일 거야?" "네. 선배 시안 구조 분석해서 다시 짰어요." "많이 나아졌네. 이번 건 아쉽지만 다음엔 이 방향으로 가보자." 책상으로 돌아왔다. 현진 선배가 슬랙을 쳤다. "봤어. 잘했어. 근데 너 주말에 작업했지?" "네... 연습하려고요." "ㅋㅋㅋ 나도 그랬어. 2년차 때 선배 파일 몰래 뜯어봤거든. 들키면 X같아 보일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진짜요?" "응. 300개 만들라는 말 했잖아. 그중에 100개는 남 거 따라 만든 거야. 그게 제일 빨라." "감사합니다." "그래도 있잖아." "네?" "220개 더 만들어야 한다는 건 변함없어 ㅎㅎ 화이팅."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차이의 정체 그날 저녁 일기장에 적었다. "선배랑 나랑 차이. 폰트 선택? 아니다. 색 조합? 아니다. 툴 숙련도? 아니다. '빼도 된다'는 확신.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판단. '여기에 집중하자'는 우선순위. 이게 경력이다. 센스 아니다. 무서워하지 않는 것. 비어 보여도 괜찮다고 믿는 것. 220개 남았다. 무섭지만 만들어야 한다. 하나씩." 수요일 점심시간. 현진 선배 시안 하나를 또 따라 만들었다. 이번엔 2시간 반 걸렸다. 30분 줄었다. 목요일에는 2시간. 금요일에는 1시간 반. 팀장님이 새 브리핑을 던졌다. "주니, 이번 주 배너 하나 부탁해. 월요일까지." 파일을 만들었다. 레이어 이름부터 정리했다. 폰트 두 개만 열었다. 색 세 개만 찍었다. 타이틀 크기를 두 배로 키웠다. 무섭지만. 여백을 두 배로 늘렸다. 불안하지만. 요소를 네 개 뺐다. 떨리지만. 저장했다. "배너_주니_최종.fig" 버전 넘버 없이. 월요일 오전, 팀장님이 10초 보더니 말했다. "오케이. 이대로 가자." 현진 선배가 지나가다 내 모니터를 봤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데?" 그 한마디에 일주일이 버틴다.219개 남았다. 무섭지만, 오늘도 하나 더 만든다.
- 04 Dec, 2025
선배 파일을 허락 없이 열어본 내 불안감
선배 파일을 허락 없이 열어본 내 불안감 그 파일을 열었다 금요일 오후 5시. 선배가 조퇴했다. "주니 씨, 먼저 갈게요. 수고하세요." "네, 편히 들어가세요." 30분 후, 나는 선배 컴퓨터 앞에 섰다. 아니, 정확히는 공용 서버 폴더였다. 선배 컴퓨터가 아니라 회사 서버. 누구나 볼 수 있는 곳. 그래도 심장이 뛰었다. 폴더명: 'OOO 메인배너_최종_0215' 클릭했다. 포토샵 파일이 열렸다. 레이어가 142개였다. 내 파일은 보통 30개 정도인데. "와..." 첫 반응은 감탄이었다. 두 번째 반응은 죄책감이었다.배우려고 한 건데 선배는 항상 파일 정리가 깔끔했다. 피드백 회의 때마다 느꼈다. "여기 이 요소는 이렇게 수정하면 돼요." 클릭 한 번에 레이어가 찾아진다. 나는 레이어를 찾다가 회의 시간을 잡아먹는다. "주니 씨, 레이어 정리 좀 해요. 나중에 본인도 못 찾아요." "네... 죄송합니다." 그래서 보고 싶었다. 선배가 어떻게 정리하는지. 그룹을 어떻게 나누는지. 이름을 어떻게 붙이는지. 학습이다. 학습. 나쁜 의도가 아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레이어를 하나씩 열어봤다. '상단_헤더_그룹' '중단_메인카피_수정본2' '하단_CTA버튼_최종' 규칙이 있었다. 위치-역할-버전. 내 레이어명은 '레이어1', '사각형2', '텍스트 복사본3' 이런 식이었다. 공책에 적었다. 선배 레이어명 규칙. 들킬까 봐 무서웠다 15분쯤 지났을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멈췄다. 급하게 파일을 닫았다. 저장하시겠습니까? 아니오. 마우스 커서가 떨렸다. 내 자리로 뛰어갔다. 의자에 앉자마자 모니터를 응시했다. 피그마를 열어뒀다. 일하는 척. 발소리는 화장실로 향했다. 다른 팀 사람이었다. "휴..." 식은땀이 났다. 등이 축축했다. 뭐가 무서운 거지? 공용 서버잖아. 누구나 볼 수 있잖아. 그런데 왜 도둑처럼 행동했지?다음 날 선배를 못 봤다 월요일 아침. 출근했다. 선배가 "주니 씨, 주말 잘 보냈어요?" 물었다. "네, 잘 보냈어요." 평소와 같았다. 그런데 내가 이상했다. 선배 얼굴을 제대로 못 봤다. 눈을 마주치면 들킬 것 같았다. 뭘 들키는데? 아무것도 안 했는데? "주니 씨, 이번 작업은 레이어 정리 잘 해봐요."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크게 했다. 목소리에 떨림이 있었다. 그날 작업하면서 선배 레이어 규칙을 써봤다. '상단_로고_그룹', '중단_타이틀_ver1'. 신기하게 찾기가 쉬웠다. 수정할 때도 빨랐다. "오, 주니 씨 레이어 정리 많이 좋아졌네요." 선배가 칭찬했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당신 파일 봤다고 말해야 하나? "감사합니다. 더 잘하겠습니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했다. 다른 파일도 열어봤다 그 후로 습관이 됐다. 선배 조퇴하는 날, 외근 가는 날, 연차 쓰는 날. 서버 폴더를 열었다. 처음엔 레이어 구조만 봤다. 나중엔 색상 팔레트를 봤다. 어떤 폰트를 쓰는지, 자간을 얼마나 주는지, 여백을 어떻게 조절하는지. 공책이 채워졌다. '선배 작업 노트'. 집에 숨겨뒀다. 실력은 늘었다. 피드백 받는 횟수가 줄었다. 팀장님이 "주니 씨, 요즘 성장 빠르네요" 했다. 기뻤다. 동시에 찝찝했다. 이건 내 실력인가? 선배를 훔쳐본 결과인가?선배한테 들켰다 지난주 목요일이었다. "주니 씨, 잠깐 얘기할까요?" 선배가 회의실로 불렀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네, 네..." 회의실 문을 닫았다. 둘만 남았다. "혹시... 제 작업 파일 본 적 있어요?" 끝났다. 들켰다. "저, 저는..." 변명이 안 나왔다. 손이 떨렸다. "아니, 화내려는 거 아니에요." 선배가 웃었다. "요즘 주니 씨 레이어 구조가 제 스타일이랑 똑같더라고요. 색상 조합도 비슷하고. 그래서 혹시 했는데." "죄송합니다. 배우고 싶어서... 그냥..." "아니, 좋은 거예요. 저도 신입 때 그랬거든요." "네?" "선배 파일 몰래 열어보고, 폰트 조합 따라하고. 그렇게 배웠어요. 다들 그래요." 선배가 말을 이었다. "근데 다음부턴 물어봐요. 같이 보면서 설명해줄게요. 그게 더 빨라요." 눈물이 날 뻔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주니 씨, 요즘 진짜 잘하고 있어요. 스스로 찾아서 배우는 거, 쉽지 않은데." 죄책감의 정체 그날 저녁, 집에 와서 생각했다. 왜 그렇게 불안했을까. 왜 도둑질하는 기분이었을까. 결론은 이거였다. 나는 내가 부족하다고 느꼈던 거다. 당당하게 물어볼 만큼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고. 선배 시간을 뺏을 자격이 없다고. 그래서 몰래 봤던 거다. 근데 선배는 당연하다고 했다. 신입은 원래 그렇게 배운다고. 내가 나를 너무 몰아세웠다. 배우고 싶어서 찾아본 건데. 성장하고 싶어서 노력한 건데. 그걸 죄책감으로 느낄 필요가 있었나. 지금은 선배한테 물어본다. "이 부분 어떻게 하신 거예요?" "파일 같이 볼 수 있을까요?" 선배는 친절하게 알려준다. 내가 몰래 본 것보다 훨씬 많은 걸 가르쳐준다. 그리고 깨달았다. 죄책감은 나의 성장을 가로막았다. 당당하게 배우는 게 더 빠르다. 신입의 권리다, 질문하는 건. 이제는 서버 폴더를 여전히 본다. 하지만 몰래 보지 않는다. "선배님, 이 파일 구조 참고해도 될까요?" "네, 당연하죠. 같이 볼까요?" 이게 정답이었다. 배우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 모르는 걸 숨기는 게 부끄러운 거다. 요즘 신입이 들어왔다. 나보다 6개월 늦게. 어제 그 신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님, 레이어 정리 어떻게 하세요?" 나는 내 파일을 열어서 보여줬다. "이렇게 하면 돼요. 필요하면 제 파일 참고해도 돼요." 그 신입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 얼굴을 보면서 알았다. 내가 받은 걸 돌려주는 거구나.죄책감 대신 질문을 배웠다. 그게 진짜 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