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참고 사이트 즐겨찾기 100개의 정체
- 21 Dec, 2025
즐겨찾기 폴더를 열었다

오늘도 Pinterest를 켰다. 30분이 지났다. 아무것도 안 했다.
즐겨찾기 폴더가 7개다. ‘레이아웃’, ‘컬러’, ‘타이포’, ‘인터랙션’, ‘일러스트’, ‘참고’, ‘나중에볼것’. 마지막 폴더에만 128개가 들어있다.
회사에서 배너 만들라고 했다. 즐겨찾기를 열었다. 한 시간 동안 봤다. 그리고 포토샵을 켰다. 결국 전에 만들던 거랑 비슷하게 만들었다.
저장해둔 디자인들은 너무 예쁘다. 내가 만드는 건 그렇지 않다.
저장의 패턴
어제 Behance에서 본 거. 브랜딩 프로젝트였다. 색 조합이 미쳤다. 저장했다.
오늘 아침 Dribbble에서 본 거. UI 디자인이었다. 여백 쓰는 게 달랐다. 저장했다.
점심시간에 인스타에서 본 거. 일러스트 스타일이 독특했다. 저장했다.
패턴이 있다.
- 보면 감탄한다
- ‘나도 이렇게 하고 싶다’ 생각한다
- 저장한다
- 다시는 안 본다
즐겨찾기에 400개가 넘는다. 기억나는 건 10개도 안 된다.
선배한테 들킨 날
“주니야, 참고 자료 좀 찾아봐.”
배너 시안 3개를 만들어야 했다. 즐겨찾기를 열었다. 탭이 20개 열렸다. Pinterest, Behance, Awwwards, CSS Design Awards…
한 시간이 지났다. 선배가 왔다.
“뭐 하고 있어?” “참고 자료 찾고 있어요.” “한 시간 동안?”
선배가 내 화면을 봤다. 탭들이 다 열려 있었다.
“이거 다 저장해뒀어?” “네…” “그래서 뭐 쓸 건데?” “아직…”

선배가 웃었다. 비웃은 건 아니었다. 그냥 아는 표정이었다.
“너 지금 구경하고 있잖아.” ”…” “예쁜 거 보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지? 근데 막상 만들려면 모르겠지?”
맞았다.
구경과 공부의 차이
그날 밤에 생각했다. 나는 디자인을 구경하고 있었다.
예쁜 디자인을 보면 좋다. 기분이 좋아진다. ‘나도 언젠가는’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게 다였다.
선배가 알려줬다.
“참고 자료를 볼 땐 질문을 해야 돼.” “질문이요?” “왜 이 색을 썼을까. 왜 이 폰트를 골랐을까. 왜 이 레이아웃을 선택했을까.”
나는 그냥 ‘예쁘다’만 생각했다.
다시 즐겨찾기를 열었다. 저장해둔 브랜딩 프로젝트를 봤다. 이번엔 다르게 봤다.
- 메인 컬러가 왜 이 색일까: 브랜드가 화장품이다. 파스텔 핑크. 여성스럽고 부드러운 느낌.
- 타이포가 왜 세리프일까: 고급스러운 이미지. 프리미엄 라인인가보다.
- 왜 이렇게 여백이 많을까: 심플하게 보이려고. 제품 사진이 돋보이게.
10분 봤다. 전보다 많이 보였다.
활용의 실패
다음날 배너를 만들었다. 어제 분석한 거 써먹으려고 했다.
파스텔 컬러를 썼다. 세리프 폰트를 썼다. 여백을 많이 뒀다.
이상했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이상했다.
선배한테 보여줬다.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참고 자료 봤어요.” “참고했어? 아니면 따라했어?”
찔렸다.

나는 그 디자인을 이해한 게 아니었다. 겉모습만 따라한 거였다.
화장품 브랜드니까 파스텔 핑크가 맞았던 거다. 우리 클라이언트는 헬스장이었다. 프리미엄 화장품이니까 세리프가 맞았던 거다. 우리는 PT 할인 이벤트였다.
맥락이 달랐다. 나는 껍데기만 가져왔다.
저장하는 이유
왜 이렇게 많이 저장했을까. 어젯밤에 생각했다.
불안해서였다.
‘좋은 디자인’을 많이 모으면 나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즐겨찾기 400개면 뭔가 실력이 늘은 것 같았다.
착각이었다. 저장하는 건 쉽다. 북마크 버튼만 누르면 된다. 1초다.
이해하는 건 어렵다. 왜 좋은지, 어떻게 만들었는지, 언제 쓸 수 있는지. 그건 시간이 걸린다.
나는 쉬운 걸 계속했다. 저장만 했다. 공부하는 척이었다.
즐겨찾기 다이어트
주말에 즐겨찾기를 정리했다. 400개 중에 350개를 지웠다.
기준을 만들었다.
- 왜 좋은지 설명할 수 있는 거
- 구체적으로 분석한 거
- 다시 볼 이유가 있는 거
50개가 남았다. 그것도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50개에 메모를 달았다.
“블루 계열 그라데이션 - 테크 느낌 + 신뢰감, 금융앱에 자주 쓰임” “산세리프 + 넓은 자간 - 모던하고 깔끔, 미니멀 브랜드 느낌” “대각선 레이아웃 - 역동적, 스포츠/패션 브랜드에 어울림”
적다 보니까 패턴이 보였다. 용도가 보였다.
월요일 아침
배너 작업이 들어왔다. 스포츠웨어 브랜드.
예전 같으면 Pinterest부터 켰을 것 같다. 이번엔 달랐다.
메모해둔 즐겨찾기를 봤다. “대각선 레이아웃 - 역동적”을 찾았다. 3분 걸렸다.
왜 대각선인지 생각했다. 움직이는 느낌. 에너지. 스포츠랑 맞다.
그걸 어떻게 적용할지 생각했다. 제품 이미지를 대각선으로. 텍스트는 반대 방향으로. 균형.
스케치했다. 만들었다. 한 시간 반 걸렸다.
선배한테 보여줬다.
“오, 괜찮은데?” “감사합니다.” “어디 참고했어?” “즐겨찾기에 있던 거요. 근데 그냥 따라한 게 아니라…”
설명했다. 왜 대각선을 썼는지. 왜 이 구도를 선택했는지.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아는구나.”
기분이 좋았다. 즐겨찾기 400개 있을 때보다 50개 있을 때가 더 잘하게 됐다.
지금 하는 방식
이제는 저장을 덜 한다. 보면 바로 분석한다.
좋은 디자인을 보면:
- 왜 좋은지 적는다 (3줄)
- 어디에 쓸 수 있을지 적는다 (1줄)
- 저장할 가치가 있으면 저장한다
- 아니면 그냥 넘긴다
대부분 넘긴다. 괜찮다.
즐겨찾기는 50개를 유지한다. 새로 저장하면 오래된 거 하나 지운다. 정말 필요한 것만 남는다.
중요한 건 개수가 아니었다. 이해였다.
부트캠프 동기 단톡
동기가 물어봤다. “참고 사이트 어디 써?”
링크를 몇 개 보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근데 중요한 건 많이 보는 게 아니라 제대로 보는 거야.”
1년 전 같으면 못 했을 말이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예쁜 거 구경만 하지 말고 왜 예쁜지 생각하면서 봐.” ”…” “나도 요즘 알았어.”
동기도 나랑 똑같을 것 같다. 즐겨찾기 300개 넘고 정작 쓸 줄은 모르는.
괜찮다. 나도 그랬으니까. 지금은 다르니까.
즐겨찾기 400개는 안심용이었다. 50개는 진짜 도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