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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디자인 옆에 내 디자인을 놓았을 때

선배 디자인 옆에 내 디자인을 놓았을 때

같은 파일명, 다른 세계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팀장님이 슬랙을 쳤다. "주니, 현진 씨랑 같은 컨셉으로 각자 시안 한 번씩 뽑아봐. 금요일 오전까지." 같은 브리핑. 같은 레퍼런스. 같은 마감. 현진 선배 경력은 5년. 나는 2년 3개월.목요일 밤 11시에 파일을 저장했다. "최종_배너_주니_1124_v3.fig" 금요일 아침, 선배 파일이 올라와 있었다. "배너_현진_최종.fig" 버전 넘버도 없다. 한 번에 끝냈다는 뜻이다. 20분의 침묵 회의실에 모니터 두 대를 켰다. 왼쪽에 선배 시안. 오른쪽에 내 시안. 같은 브리핑이 맞나 싶었다. 선배 건 보는 순간 알았다. "아, 이거다." 내 건 보는 순간도 알았다. "아, 이게 아닌데." 팀장님이 20분 동안 두 개를 번갈아 봤다. 나는 책상 모서리를 손톱으로 긁었다. "주니 거, 요소는 다 들어갔는데..." 들어갔는데. 이 말 뒤에는 항상 문제가 온다. "현진 거는 한눈에 들어오네. 이걸로 가자." 회의가 끝났다. 선배는 자리로 돌아가서 다른 작업을 시작했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물을 마셨다. 10분 동안.파일을 열었다 점심시간에 혼자 남아서 두 파일을 나란히 띄웠다. 선배 파일부터. 레이어 이름이 정갈하다. "bg_gradient", "cta_button", "text_headline". 내 파일. "사각형 1 복사본 3", "그룹 해제 23", "레이어 189". 이건 정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선배 시안은 여백이 숨을 쉰다. 내 시안은 여백이 불안하다. 뭔가 더 채워야 할 것 같다. 선배 건 폰트가 두 개다. 본문, 강조. 끝. 내 건 폰트가 네 개다. 각각 다 이유가 있었는데 지금 보니 산만하다. 선배 건 색이 세 개다. 메인, 서브, 포인트. 내 건 색이... 스포이트로 찍어봤다. 일곱 개다. "통일성"이라는 게 이런 건가. 대체 어떻게 이렇게 선택을 적게 하는데 더 풍부해 보이는 거지. 구조를 뜯어봤다 선배 시안을 레이어별로 껐다 켰다 해봤다. 타이틀 끄니까 CTA 버튼이 자연스럽게 시선을 끈다. 버튼 끄니까 이미지가 말을 한다. 이미지 끄니까 배경 그라데이션이 공간을 잡는다. 뭘 빼도 무너지지 않는다. 내 시안은. 타이틀 끄니까 허전하다. 버튼 끄니까 어디 봐야 할지 모르겠다. 이미지 끄니까 텅 빈다. 각 요소가 서로를 안 믿는다. 혼자 목소리를 높인다. 30분 동안 레이어를 켰다 껐다 반복했다. 답은 여기 있는데. 내가 못 읽는 거다.센스냐, 경험이냐 퇴근길 지하철에서 현진 선배한테 슬랙을 보냈다. "선배, 제 시안이랑 선배 시안 차이가... 어디서 나는 것 같으세요?" 10분 뒤 답이 왔다. "응 나도 2년차 때 너랑 똑같았어. 요소 다 넣으려고 안간힘 썼지." "그럼 언제부터 달라진 거예요?" "음... 빼도 된다는 걸 알았을 때?" "그게 언제였어요?" "300개쯤 만들고 나니까." 300개. 나 지금 몇 개 만들었지. 회사 들어와서 배너, 상세페이지, 팝업 합쳐서... 한 80개? 220개 남았다. 220개 더 만들면 나도 저렇게 될까. 아니면 220개 만들어도 센스가 없으면 소용없는 걸까. 집에 와서 노트에 적었다. "경력 5년 = 시안 몇 개?" 계산해봤다. 주 5일, 하루 1개씩만 쳐도 연 250개. 5년이면 1,250개. 나랑 1,170개 차이. 이게 "경험"의 물리적 거리구나. 못 보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주말에 현진 선배 시안을 프린트했다. 책상에 붙이고 따라 만들어봤다. 똑같이. 레이어 이름까지 똑같이. 폰트 사이즈, 자간, 행간, 컬러 코드 전부. 3시간 걸렸다. 완성하고 나니까 뭔가 보였다. 타이틀 크기가 생각보다 크다. 겁 없이 크다. 여백이 생각보다 넓다. 불안할 만큼 넓다. 컬러가 생각보다 절제돼 있다. 심심할 만큼. 근데 이게 더 시원하다. 더 읽힌다. 더... 프로페셔널하다. 그다음 내 시안을 선배 방식으로 고쳐봤다. 폰트 4개를 2개로. 색 7개를 3개로. 요소 12개를 8개로. 여백을 1.5배로. 저장하고 봤다. "어? 이게 더 낫잖아?" 근데 이걸 처음부터 못 한 거다. 빼는 게 무서웠다. 비어 보일까 봐. 못 만든 것처럼 보일까 봐. 디자인은 더하기가 아니었다 월요일 아침, 팀장님한테 메시지 보냈다. "지난 시안, 다시 한번 수정해봐도 될까요?" "응? 이미 현진 거로 진행 들어갔는데. 왜?" "제가 뭘 놓쳤는지 알 것 같아서요. 연습 삼아서라도." "그래, 한번 해봐." 화요일 오전에 수정본 올렸다. 팀장님이 30초 보더니 말했다. "오, 이게 금요일 거야?" "네. 선배 시안 구조 분석해서 다시 짰어요." "많이 나아졌네. 이번 건 아쉽지만 다음엔 이 방향으로 가보자." 책상으로 돌아왔다. 현진 선배가 슬랙을 쳤다. "봤어. 잘했어. 근데 너 주말에 작업했지?" "네... 연습하려고요." "ㅋㅋㅋ 나도 그랬어. 2년차 때 선배 파일 몰래 뜯어봤거든. 들키면 X같아 보일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진짜요?" "응. 300개 만들라는 말 했잖아. 그중에 100개는 남 거 따라 만든 거야. 그게 제일 빨라." "감사합니다." "그래도 있잖아." "네?" "220개 더 만들어야 한다는 건 변함없어 ㅎㅎ 화이팅."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차이의 정체 그날 저녁 일기장에 적었다. "선배랑 나랑 차이. 폰트 선택? 아니다. 색 조합? 아니다. 툴 숙련도? 아니다. '빼도 된다'는 확신.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판단. '여기에 집중하자'는 우선순위. 이게 경력이다. 센스 아니다. 무서워하지 않는 것. 비어 보여도 괜찮다고 믿는 것. 220개 남았다. 무섭지만 만들어야 한다. 하나씩." 수요일 점심시간. 현진 선배 시안 하나를 또 따라 만들었다. 이번엔 2시간 반 걸렸다. 30분 줄었다. 목요일에는 2시간. 금요일에는 1시간 반. 팀장님이 새 브리핑을 던졌다. "주니, 이번 주 배너 하나 부탁해. 월요일까지." 파일을 만들었다. 레이어 이름부터 정리했다. 폰트 두 개만 열었다. 색 세 개만 찍었다. 타이틀 크기를 두 배로 키웠다. 무섭지만. 여백을 두 배로 늘렸다. 불안하지만. 요소를 네 개 뺐다. 떨리지만. 저장했다. "배너_주니_최종.fig" 버전 넘버 없이. 월요일 오전, 팀장님이 10초 보더니 말했다. "오케이. 이대로 가자." 현진 선배가 지나가다 내 모니터를 봤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데?" 그 한마디에 일주일이 버틴다.219개 남았다. 무섭지만, 오늘도 하나 더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