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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은데

이 길이 맞나 싶은데 다른 걸 할 줄이 없다

이 길이 맞나 싶은데 다른 걸 할 줄이 없다

오늘도 이력서 열어봤다새벽 2시에 사람인 켜놓고 있었다. '경력직 디자이너 모집'이라는 공고들. 자격요건 보다가 껐다. 3년 이상. 포트폴리오 필수. 나는 2년. 포트폴리오는 있는데 보여주기 창피한. 이런 밤이 한 달에 두세 번씩 온다. 선배한테 '이건 좀...'이라는 말 들었을 때. 팀장님이 한숨 쉬실 때. 디자인 파일 열어서 한 시간 째 커서만 깜빡일 때.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나 이거 아닌가 보다.'부트캠프 동기 단톡방에 올라온 글. "취업 준비하면서 UX 라이터 쪽도 보고 있어요." 좋아요 5개. 댓글은 없다. 나도 생각해본 적 있다. 전직. 마케터도 봤고. 기획자도 봤고. 유튜버 채용 공고도 클릭해봤다. '디자인 할 줄 아는 사람 우대'라고 써있어서. 근데 지원서는 안 썼다. 2년이 아까워서. 투자한 시간들 디자인 배운다고 부트캠프 다녔다. 6개월. 600만원. 부모님이 내주셨다. "주니야, 네가 하고 싶은 거 해." 그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취준 기간 8개월. 포트폴리오 10번 갈아엎었다. 면접 15곳. 떨어진 곳 14곳. 붙은 곳이 지금 회사다. 입사하고 2년. 선배들한테 까이면서 배운 것들. 그리드 시스템. 컴포넌트 정리법. 피드백 받는 법. 아직도 부족하지만 0에서는 왔다. 이걸 다 버리고 다른 걸 시작한다? 또 신입부터? 또 면접? 또 600만원? 계산기 두드려봤다. 2년 월급 모은 거. 1500만원. 부트캠프비 600만원. 취준 기간 생활비 300만원. 총 2400만원. 이게 매몰비용인지 투자인지 모르겠다. 다른 선택지는 뭔데가끔 친구들 만난다. 대학 동기들. 다들 다른 일 한다. 은행 다니는 애는 말했다. "주니야, 디자이너 되게 좋아 보이는데? 크리에이티브하고." 웃으면서 "응, 좋아"라고 했다. 마케팅하는 애는 물었다. "연봉은 좀 오르니?" "조금씩은." 거짓말이다. 작년에 3.5프로 올랐다. 프리랜서 하는 애가 제일 솔직했다. "나도 매일 때려치울까 생각해. 근데 다른 거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그 말이 제일 찔렸다. 나도 그렇다. 디자인 빼면 뭐가 있나. 포토샵? 피그마? 어도비 일러스트? 이거 들고 뭘 하지. 영어도 토익 700점대. 코딩은 HTML 조금. 글쓰기도 블로그 일기 수준. 결국 디자인밖에 없다. 그게 제일 무섭다. 선배의 한마디 지난주 회식 자리. 선배가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니야, 나도 3년 차까지 매일 때려치울까 생각했어." "네?" "근데 5년 차 되니까 좀 보이더라. 뭘 모르는지가." 그 말이 위로가 됐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3년 더 버텨야 한다'는 협박인지. 그래도 물어봤다. "그럼 선배님은 지금 괜찮으세요?" "괜찮진 않아. 근데 이게 내 일이긴 해." 집 가는 길에 그 말 곱씹었다. '이게 내 일이긴 해.'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언제쯤. 포트폴리오 다시 열어봤다 주말에 1년 전 포트폴리오 파일 찾았다. 취준할 때 만든 거. 지금 보니까 민망하다. 레이아웃도 들쑥날쑥. 폰트도 왜 저렇게 썼지. 그래도 이걸로 붙었다. 지금 다시 만든다면? 확실히 낫게 만들 것 같다. 2년 동안 배운 게 있긴 하다. 어제 작업한 배너 다시 봤다. 선배한테 5번 피드백 받고 통과된 거. 1년 전 나는 이거 못 만들었을 거다. 성장은 하고 있는 건가. 느리지만. 사람인 북마크 폴더 열어봤다. '이직 고려' 폴더. 공고 23개. 하나도 안 지워졌다. 클릭했다가 껐다. 또 내일 보자. 그래도 아침은 온다 출근길 지하철. 가방에서 태블릿 꺼냈다. 핀터레스트 켜서 레퍼런스 저장한다. 좋은 디자인 보면 그래도 기분이 좋다. '나도 이렇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 이게 아직 있다는 게 다행인가. 회사 도착. 9시 3분. 자리 앉아서 피그마 켰다. 어제 못 끝낸 작업 이어서 한다. 팀장님이 지나가면서 말했다. "주니야, 어제 배너 괜찮던데.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이럴 때는 생각한다. '오늘은 버틸 만하네.' 그렇게 하루가 또 간다. 때려치울까 고민하면서도. 내일도 출근할 거면서.이 길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근데 지금 당장 다른 길도 없다. 그래서 오늘도 피그마를 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