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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 05 Jan, 2026
입버릇 '네, 알겠습니다'에 숨겨진 불안감
입버릇 '네, 알겠습니다'에 숨겨진 불안감 아침 9시, 슬랙 알림 출근하자마자 팀장님 슬랙. "주니씨, 오늘 3시까지 배너 3종 수정 가능할까요?" 손가락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네, 알겠습니다." 보내고 나서 캘린더를 봤다. 10시 회의, 12시 런치미팅, 2시 디자인 리뷰. 남은 시간 2시간. 배너 3종이면 최소 4시간은 걸리는데. 다시 슬랙을 봤다. 이미 읽음 표시. 지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기엔 너무 늦었다. 커피를 마셨다. 아직 9시 10분이다.회의실에서 디자인 리뷰 시간. 선배가 내 시안을 띄웠다. 큰 모니터에 내 작업물. 20명이 보고 있다. "이 부분 컨셉 설명 좀 해줄래요?" 머릿속이 하얗게 됐다. 컨셉? 그냥 레퍼런스 보고 만든 건데. "저기... 트렌디한 느낌으로..." "트렌디요? 구체적으로?" "...네." 선배가 대신 설명했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주니씨, 이해했죠?" "네, 알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30%만 알아듣었다. 나머지 70%는 메모하면서 나중에 구글링해야 한다. 회의가 끝났다. 화장실로 갔다.점심시간 동기한테 카톡 보냈다. "나 오늘 또 '네 알겠습니다' 10번은 한 것 같아" "ㅋㅋㅋ 우리 회사말 아니냐" "근데 진짜 반도 이해 못 한 거 같은데" "다들 그래. 나중에 물어보면 돼" 나중에 물어본다. 맞는 말이다. 근데 언제? 선배들 다 바쁜데. 런치미팅에서도 또 했다. "이번 프로젝트 컨셉 잡혔죠?" "네, 알겠습니다." 안 잡혔다. 컨셉이 뭔지도 모르겠다. 그냥 예쁘게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샐러드를 먹었다. 맛이 없었다. 오후 3시, 배너는 3종 중 1종 완성. 팀장님이 지나가면서 봤다. "오, 잘 되고 있네요. 3시까지죠?" "...네." 불가능하다. 2종은 시작도 못 했다. 손이 떨렸다. 마우스를 놓쳤다. 슬랙을 켰다. "죄송하지만 시간이 부족할 것 같습니다" 타이핑했다. 지웠다. "죄송합니다. 조금 늦어질 것 같습니다" 다시 썼다. 또 지웠다. 그냥 만들자. 대충이라도.5시 30분, 제출 3종 다 보냈다. 마지막 2종은 퀄리티가 영 아니다. 알고 있다. 30분 후 피드백 왔다. "2, 3번은 조금 더 다듬어주세요. 내일 아침까지 가능할까요?" "네, 알겠습니다." 또 했다. 자동 반사. 남자친구한테 카톡 보냈다. "오늘 야근" "몇 시까지?" "모르겠어. 8시?" "힘내" 고마운데 위로가 안 됐다. 저녁 7시, 혼자 사무실에 5명 남았다. 다들 야근. 2, 3번 배너를 다시 켰다. 뭘 고쳐야 할까. "조금 더 다듬어달라"는 게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여백? 폰트? 컬러? 전체 레이아웃? 선배한테 물어볼까. 아직 자리에 있다. 일어섰다가 앉았다. 또 물어보면 "왜 회의 때 안 물어봤어?" 소리 들을 것 같다. 그냥 내 생각대로 하자. 틀려도 어쩔 수 없다. 여백을 줄였다. 폰트를 키웠다. 컬러를 조금 바꿨다. 더 나아진 건지 모르겠다. 그냥 달라 보이긴 한다. 밤 9시, 퇴근길 지하철에서 슬랙 확인. 팀장님이 좋아요 눌렀다. "수고했어요" 안도감보다 불안감이 먼저 왔다. 내가 뭘 한 거지? 그냥 시키는 대로 한 건데. '알겠습니다'를 몇 번이나 말했을까. 세어보지도 못했다. 정말 알고 있었나? 반도 이해 못 한 것 같은데. 집에 도착했다.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웠다. 내일도 똑같겠지. "네, 알겠습니다" 10번쯤 더 할 것 같다. 주말, 생각 남자친구랑 카페에 왔다. "요즘 힘들어 보여" "응... 좀" "무슨 일인데?" 설명하려다가 관뒀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나는 회사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알아듣는 척하는 사람이야. 진짜 이해한 적은 거의 없어.' 이렇게 말하면 한심해 보일 것 같았다. "그냥 업무가 많아" 거짓말은 아니다. 반만 사실이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쓴맛이 강했다. 핸드폰을 켰다. 슬랙 알림 3개. 주말인데도 확인하는 나. "네, 알겠습니다" 타이핑하려다가 껐다. 월요일에 답하자. 월요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 오늘은 다르게 해보자. 모르면 물어보자. '알겠습니다' 대신 '확인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하자. 9시 도착. 선배가 말 걸었다. "주니야, 이거 오늘 중으로 가능해?" "네, 알겠습니다." 또 했다. 0.5초 만에. 계획은 무너졌다. 습관은 강했다. 책상에 앉았다. 모니터를 켰다. 슬랙 알림 7개. 하나씩 읽었다. 전부 다 "네, 알겠습니다"로 답할 내용들이었다. 첫 번째 답장을 보냈다. "네, 알겠습니다." 두 번째도. "네, 알겠습니다." 타이핑하면서 웃음이 나왔다. 비웃음 같은 것. 점심시간, 깨달음 혼자 밥 먹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왜 매번 '알겠습니다'라고 할까. 모르는데도. 시간 없는데도. 자신 없는데도. 이유는 간단했다. 거절하는 게 무서워서. "어렵습니다"라고 말하면 무능해 보일까 봐.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면 선배들이 실망할까 봐. "시간이 부족합니다"라고 하면 의지가 없어 보일까 봐. 그래서 '네'라고 한다. 일단. 나중 일은 나중의 내가 해결한다. 항상 그랬다. 근데 나중의 나는 항상 힘들었다.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고. 오후, 작은 시도 디자인 리뷰 시간. 팀장님이 물었다. "이 컨셉으로 가면 될까요?" 입이 열렸다. "네"가 나올 것 같았다. 잠깐 멈췄다.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내 목소리였다. 떨렸지만 나왔다. "타겟 연령대가 20대 초반인지 후반인지에 따라 톤앤매너가 달라질 것 같아서요." 팀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지적이네요. 20대 중반으로 잡읍시다." "네, 알겠습니다." 또 했다. 근데 이번엔 달랐다. 진짜 알아들었으니까. 회의가 끝났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작은 질문 하나. 별거 아닌데 뿌듯했다. 저녁, 남자친구와 퇴근하고 남자친구 만났다. "오늘 좀 어때?" "응... 괜찮았어." "진짜?" "응. 회의에서 질문 하나 했거든." "오 대박. 무슨 질문?" 설명했다. 별거 아닌 것 같았는데 말하니까 뿌듯했다. "잘했네. 원래 그렇게 하는 거지." "근데 나 또 '네 알겠습니다' 엄청 했어." "그래도 하나 물어본 거면 진전이잖아." 맞는 말이다. 0에서 1로 간 거니까. 내일은 2개 물어볼까. 모레는 3개. 천천히 가자. 화요일, 또 다른 시도 아침 회의. "이거 오늘까지 할 수 있어요?" 멈췄다. 캘린더를 봤다. "오늘은 어려울 것 같은데, 내일 오전까지는 가능할까요?" 선배가 웃었다. "그래, 그럼 내일 오전까지." 끝이었다. 생각보다 쉬웠다. 거절한 게 아니라 협상한 거였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점심 먹으면서 동기한테 카톡 보냈다. "나 오늘 데드라인 조정했어" "헐 대박" "응 ㅋㅋ 별거 아닌데 신기하다" "그게 제일 어려운 거임" 맞다. 제일 어려운 거 하나 했다. 한 달 후 여전히 '네, 알겠습니다'는 자주 말한다. 근데 빈도가 줄었다. 하루에 10번에서 5번으로. 그리고 진짜 알고 말할 때가 늘었다. 모르면 "확인하고 답변드릴게요"라고 한다. 시간 없으면 "일정 조율 가능할까요"라고 한다. 완벽하진 않다. 여전히 습관처럼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근데 예전처럼 죄책감은 안 든다. 조금씩 바뀌고 있으니까. 선배가 말했다. "요즘 주니 많이 성장한 것 같아." "감사합니다." '네, 알겠습니다'가 아니라 '감사합니다'라고 답했다. 작은 차이지만 큰 차이였다. 지금 여전히 불안하다. 회의 들어갈 때마다 손에 땀이 난다. 시안 보여줄 때마다 심장이 빨리 뛴다.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나서 후회할 때도 있다. 근데 알았다. 완벽해질 필요는 없다는 것. 조금씩 나아지면 된다는 것. '네, 알겠습니다' 대신 '확인해볼게요' '질문 하나 있습니다' '시간 조금 더 주실 수 있을까요' 이런 말들을 섞어가며 쓰는 것. 그게 성장이다. 오늘도 출근한다. 슬랙 알림이 뜬다. 답장하기 전에 3초 생각한다. 진짜 알아들었나. 시간은 충분한가. 모르는 게 있나. 그리고 답한다. 가끔은 '네, 알겠습니다' 가끔은 '확인해보겠습니다' 가끔은 '질문 있습니다' 섞어서.'네, 알겠습니다'는 나쁜 말이 아니다. 다만 진짜 알 때 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