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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보내기 전 10번 읽는 습관

메시지 보내기 전 10번 읽는 습관

메시지 보내기 전 10번 읽는다 9시 42분, 첫 번째 시도 메시지 창에 타이핑한다. "선배님 시안 확인 부탁드립니다" 엔터를 누르려다 멈춘다. 뭔가 이상하다. 너무 짧나? 무례한가? 지운다. "선배님, 어제 말씀하신 시안 수정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좀 낫다. 근데 '어제'가 필요한가? 선배가 기억 못 하나?또 지운다. 10분 경과 세 번째 버전이다. "선배님, 시안 수정 완료했습니다! 확인 부탁드려요." 느낌표가 과한 거 같다. 너무 들뜬 것처럼 보인다. 이건 진지한 업무다. 느낌표 지운다. "선배님, 시안 수정 완료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완료와 확인이 겹친다. 단어 선택이 마음에 안 든다. "선배님, 수정한 시안 전달드립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전달드립니다가 더 나은가? 아니면 공유드립니다? 손가락이 멈춘다. 타이밍 문제 지금 보내도 되나? 선배가 회의 중인가? 아침에 바쁘지 않나? 점심 전에 보내는 게 나을까? 슬랙 상태를 본다. 초록불이다. 자리에 있다는 뜻. 근데 초록불이라고 바로 보면 되나? 혹시 집중하는 중이면? 메신저 창을 최소화한다. 피그마를 연다. 시안을 다시 본다. 괜찮은 거 같은데. 근데 선배가 보면 또 뭐라고 할까. 메신저를 다시 연다.경어법 지옥 네 번째 수정. "선배님, 수정한 시안 전달드립니다." 부탁드립니다를 뺐다. 너무 구걸하는 것 같아서. 근데 너무 건조한가? "선배님, 수정한 시안 전달드립니다. 시간 나실 때 확인 부탁드립니다." 시간 나실 때가 더 공손하다. 압박하지 않는 느낌. 근데 너무 눈치 보이는 거 아냐? "선배님, 수정한 시안입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심플하게. 깔끔하게. 마음에 든다. 엔터를 누르려고. 멈춘다. 혹시 이모티콘을 넣어야 하나? 선배가 가끔 웃는 이모티콘을 쓴다. 나도 써야 친근한가? 아니다. 업무 메시지에 이모티콘은 오버다. 11시 03분 21분이 지났다. 아직도 메시지를 못 보냈다. 다섯 번째 버전. "선배님, 수정 시안 전달드립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한'을 뺐다. '수정한'보다 '수정' 시안이 더 자연스럽다. 좋다. 이거다. 손가락이 엔터 위에 있다. 근데 파일 링크는? 링크 먼저 보내고 메시지? 메시지 먼저 보내고 링크? 링크를 복사한다. 메시지 아래에 붙인다. "선배님, 수정 시안 전달드립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https://figma.com/file/..." 링크가 너무 길다. 메시지가 지저분해 보인다.링크를 위로 올린다. "선배님, https://figma.com/file/... 수정 시안입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이게 낫다. 링크가 먼저 보인다. 아니다. 인사가 먼저여야 한다. 또 순서를 바꾼다. 최종 버전 여섯 번째. "선배님, 수정 시안 전달드립니다. https://figma.com/file/... 확인 부탁드립니다." 괜찮다. 공손하다. 명확하다. 깔끔하다. 엔터를 누른다. 아니다. 다시 지운다. '전달드립니다'와 '확인 부탁드립니다'가 똑같이 '~니다'로 끝난다. 리듬감이 없다. "선배님, 수정 시안 전달드립니다. https://figma.com/file/... 확인 부탁드려요." 마지막만 '~요'로 바꿨다. 좀 더 부드럽다. 근데 존댓말이 섞였다. 통일성이 없다. "선배님, 수정 시안 전달드립니다. https://figma.com/file/... 확인 부탁드립니다." 다시 원래대로. 11시 17분 34분이 지났다. 한 줄 메시지에 34분. 이게 정상인가? 다른 사람들은 그냥 보낸다. 생각하고 타이핑하고 엔터. 3초면 끝난다. 나는 왜 이렇게 오래 걸리나? 손가락이 떨린다. 엔터 키 위에서. 마지막으로 읽는다. 일곱 번째. "선배님, 수정 시안 전달드립니다. https://figma.com/file/... 확인 부탁드립니다." 문제없다. 완벽하다. 엔터를 누른다. 드디어. 11시 17분 30초 메시지가 전송됐다. 심장이 뛴다. 선배가 바로 읽었다. 초록 체크 두 개. 타이핑 중이다. 말풍선이 움직인다. "넵" 끝이다. 선배의 답장. 한 글자. 35분 고민한 메시지에 대한 답이 한 글자다. 웃음이 나온다. 허무하다. 근데 기분은 나쁘지 않다. 일단 보냈다. 선배가 확인했다. 괜찮은 거 같다. 메시지가 이상하지 않았나 보다. 점심시간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다른 팀 동기가 말한다. "너 메시지 왜 그렇게 천천히 보내?" "응?" "아까 봤는데 30분 동안 타이핑하더라." 들켰다. "그냥... 확인하는 거." "뭘 확인해?" "문법이랑 그런 거." 동기가 웃는다. "메시지에 문법이 어딨어. 그냥 보내면 되지." 그냥 보내면 된다. 맞는 말이다. 근데 난 못 한다. 그냥 보내면 불안하다. 선배가 이상하게 볼까 봐. 무례하다고 생각할까 봐. 내가 일을 대충 한다고 오해할까 봐. 메시지 하나로 평가받는 것 같다. 오후 3시 또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이번엔 다른 선배에게. "선배님, 배너 시안 3개 준비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타이핑한다. 멈춘다. 3개가 맞나? 세 개로 써야 하나? 아니다. 3개가 더 명확하다. 근데 '준비했습니다'가 맞나? '만들었습니다'? '작업했습니다'? 지운다. "선배님, 배너 시안 3개 완성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완성이 더 낫다. 준비는 뭔가 덜 끝난 느낌. 엔터를 누른다. 아니다. 또 지운다. 시간을 본다. 벌써 5분이 지났다. 오늘도 똑같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생각한다. 왜 이렇게 메시지 하나 보내는 게 어려울까. 초등학생도 카톡 한다. 친구들한테는 나도 막 보낸다. 'ㅇㅇ', '어', '굿' 이런 거. 근데 회사에서는 다르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무겁다. 선배들은 나를 어떻게 볼까. 메시지 하나로 판단할까. 아마 안 할 것이다. 선배들도 바쁘다. 내 메시지 하나하나 기억 못 한다. 근데 나는 기억한다. 내가 보낸 모든 메시지. 어색했던 문장들. 오타 냈던 순간들. 혼자 부끄러워한다. 집에 와서 남자친구한테 톡이 왔다. "저녁 먹었어?" 바로 답한다. "응 먹었어" 3초 만에. 고민 없이. 편하다. 친구들한테도 그렇다. 왜 회사에서만 이럴까. 답을 안다. 무섭기 때문이다. 평가받는 게.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는 게. 일 못 한다고 찍히는 게. 메시지 하나가 나를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10번 읽는다. 비효율적이다. 시간 낭비다. 근데 못 고친다. 내일도 내일도 똑같을 것이다. 선배한테 메시지 보낼 때. 10분씩 고민할 것이다. 경어법 확인하고. 톤 맞추고. 타이밍 재고. 그러다 보내면. 선배는 "ㅇㅋ" 이렇게 답할 것이다. 허무할 것이다. 근데 안심할 것이다.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에. 언젠가는 나도 그냥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하고 타이핑하고 엔터. 3초 만에. 그날이 올까. 모르겠다. 지금은 이게 최선이다. 10번 읽고 보내는 것.오늘도 메시지 하나에 35분 걸렸다. 선배 답장은 한 글자였다. 내일도 똑같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