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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만
- 06 Dec, 2025
회의 때 고개만 끄덕끄덕하는 내가 전달한 것은 무엇인가
회의 때 고개만 끄덕끄덕하는 내가 전달한 것은 무엇인가 오늘도 끄덕였다 회의실 들어갔다. 자리는 맨 끝. 노트북 열고 펜 꺼냈다. 필기할 준비. "이번 프로젝트 컨셉 브레인스토밍 시작하겠습니다." 팀장님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니어님 생각은 어때요?" 심장이 쿵했다. "아... 네... 좋은 것 같습니다." 또 끄덕였다. 회의 끝나고 나왔다. 50분 동안 내가 한 말은 딱 세 문장. "좋은 것 같습니다", "네 맞습니다", "확인하겠습니다". 그리고 고개는 37번쯤 끄덕인 것 같다. 세진 않았지만 목이 아프다.끄덕임의 정확한 의미 집에 와서 생각했다. 내 끄덕임이 전달한 건 뭘까. '당신 말이 맞아요'였을까. 아니다. 나는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이해했어요'였을까. 그것도 아니다. 이해 못 한 부분이 태반이다. '열심히 듣고 있어요'? 이건 맞다. 근데 듣기만 하는 게 참여일까. 정확히 말하면 내 끄덕임은 이거다. '저 여기 있습니다. 방해는 안 할게요.' 회의에서 투명인간 되는 법. 고개만 끄덕이면 된다. 민수 선배가 지난주에 말했다. "주니어, 회의 때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봐." 나는 그때도 고개를 끄덕였다.침묵하는 순간들 브레인스토밍 회의는 매주 금요일 3시. 일주일 중 가장 긴장되는 시간이다. 첫 번째 침묵. "이번 메인 비주얼 어떻게 갈까요?" 머릿속에 이미지가 있다. 어제 핀터레스트에서 본 레퍼런스. 저거랑 비슷하게 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입이 안 열린다. '혹시 이거 유치한 아이디어 아닐까?' '선배들이 이미 생각한 건 아닐까?' '말했다가 이상하면 어떡하지?' 결국 아무 말도 안 했다. 성우 선배가 내가 생각한 거랑 비슷한 걸 말했다. 다들 좋다고 했다. 나는 또 끄덕였다. 두 번째 침묵. "타이포 스타일은?" 나는 산세리프가 더 맞을 것 같았다. 클라이언트 브랜드 가이드 보니까 거기도 고딕 계열 썼다. 그런데 팀장님이 명조 이야기를 꺼냈다. '아 내가 잘못 본 건가?' '가이드 다시 확인해볼까?' '지금 말하면 회의 흐름 끊는 거 아닐까?' 입 다물었다. 회의 끝나고 팀장님한테 따로 말씀드렸다. "저기... 산세리프는 어떨까요?" "아 그것도 괜찮네. 회의 때 얘기하지 그랬어." 회의 때 말할 걸. 그 순간은 지나갔다. 세 번째 침묵. "이거 너무 평범한 거 아니야?" 선배가 만든 시안 보면서 다들 얘기한다. 나도 그렇게 느꼈다. 어제 작업 파일 봤을 때부터. 그런데 그 선배는 나한테 항상 잘해준다. 점심도 사주고 퇴근길에 태워주기도 한다. '내가 뭔데 선배 시안을 평가해?' '나도 제대로 못 만들면서?' 끄덕이고 있었다.끄덕임이 만든 것들 회의 후 일주일. 컨셉 확정됐다. 명조 타이포로 갔다. 클라이언트 피드백 왔다. "브랜드랑 안 맞는 것 같은데요. 산세리프로 바꿔주세요." 팀장님이 한숨 쉬었다. "처음부터 다시네." 그때 민수 선배가 나를 봤다. 나도 선배를 봤다. 아무 말 안 했지만 둘 다 알았다. 내가 회의 때 말했으면 이런 일 없었을 거라는 걸. 야근 시작됐다. 3일 동안 타이포 다시 잡았다. 내 침묵이 만든 야근이다. 그리고 또 다른 것도 만들었다. '의견 없는 디자이너'라는 이미지. 지난주 인사팀에서 1:1 면담했다. "업무에 어려움은 없나요?" "없습니다." 고개 끄덕. "성장하고 있다고 느껴요?" "네." 고개 끄덕. 거짓말이다. 어렵고 안 자라는 것 같다. 그런데 말을 못 했다. 면담 끝나고 기록 공유받았다. '업무 만족도 높음. 특이사항 없음.' 내 끄덕임이 만든 기록이다. 실제 내 상태랑은 전혀 다른. 말하지 않으면 없는 것 성우 선배랑 술 마셨다. 취해서 물어봤다. "선배는 회의 때 어떻게 그렇게 말 잘해요?" "잘하는 거 아니야. 그냥 해." "틀리면요?" "틀리면 배우지." 간단했다. 나는 너무 복잡하게 생각했다. 선배가 또 말했다. "너 머릿속에 생각 많더라. 파일 보면 알아." "네?" "레이어 정리 되게 잘해. 디테일도 챙기고. 근데 왜 회의 때는 그걸 안 꺼내?" 몰랐다. 선배가 내 작업을 그렇게 봤다는 것도. 내가 생각이 있다는 걸 알았다는 것도. "말 안 하면 없는 거야. 디자이너는 작업만 하는 게 아니라 설명도 해야 돼." 집에 오는 길에 생각했다. 내 포트폴리오에 적힌 말들. '사용자 중심 디자인' '문제 해결 능력' '커뮤니케이션 스킬' 다 거짓말이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사용자 중심으로 생각해도 말을 안 하면 모른다. 문제를 알아도 말을 안 하면 해결 안 된다. 커뮤니케이션은 혼자 고개 끄덕이는 게 아니다. 끄덕임을 멈춘 날 이번 주 금요일 회의. 각오했다. 오늘은 꼭 말한다. "랜딩페이지 레이아웃 의견 있어요?" 손을 들었다. 떨렸다. "저... 모바일 퍼스트로 가면 어떨까요? 트래픽 데이터 보니까 모바일이 73%거든요." 다들 나를 봤다. 3초가 3시간 같았다. 팀장님이 말했다. "오 좋은데? 그럼 모바일 기준으로 잡아볼까요?" 끝이었다. 세상이 무너지지 않았다. 회의 끝나고 민수 선배가 어깨 쳤다. "오늘 좋았어. 데이터 근거 들어서 말하니까 설득력 있더라." 화장실 갔다. 거울 봤다. 여전히 똑같은 얼굴인데. 뭔가 달라 보였다. 목소리 낸 사람의 얼굴. 집에 와서 일기 썼다. '오늘 회의에서 의견 말했다. 떨렸다. 그런데 괜찮았다.' 짧은 문장이지만. 2년 동안 한 번도 쓰지 못한 문장이다. 여전히 어렵지만 다음 주 회의. 또 말했다. 이번엔 덜 떨렸다. "컬러 팔레트 좀 더 밝게 가면 어떨까요? 타겟이 2030인데 지금 톤이 너무 무거운 것 같아서요." 누가 물었다. "어떤 톤으로?" 준비 안 했던 질문이다. 당황했다. "저... 레퍼런스 찾아서 다음 회의 때 보여드려도 될까요?" 팀장님이 웃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완벽하지 않아도 됐다. 말을 시작하는 게 중요했다. 여전히 회의는 어렵다. 말하기 전에 심장 뛴다. 틀릴까 봐 무섭다. 그런데 알았다. 고개만 끄덕이는 게 더 무섭다는 걸. 침묵이 더 큰 실수라는 걸. 내 끄덕임이 전달했던 건 결국. '나는 여기 없습니다'였다. 이제는 다른 걸 전달하고 싶다. '나는 여기 있습니다. 서툴지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완벽한 의견이 아니어도 된다. 데이터가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시작하는 것. 입을 여는 것. 그게 주니어 디자이너가 회의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어제 성우 선배가 말했다. "요즘 주니어 많이 컸네. 회의 때 네 의견 듣는 게 좋아." 그 말 듣고 기분 좋아서. 저녁 내내 웃었다. 고개만 끄덕이던 내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회의실에서 고개 끄덕이는 대신, 오늘은 손을 들어본다. 떨려도.